일제 강점기·독재시절 '저항 카타르시스'

시사만화 역사


   
 
  ▲ 1909년 6월2일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관재 이도영의 첫 시사만화.  
 
한국 시사만화가 탄생한지 올해로 99주년이 됐다. 내년 6월이면 1백주년이 된다. 그간 한국 시사만화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수난을 겪어왔다. 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시사만화의 시초는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에 실린 관재 이도영의 삽화였다. 입에서 나온 4갈래의 선에 대사가 적혀 있는 형태다. 지금의 삽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이도영의 시사만화는 일제의 탄압과 친일세력에 관한 풍자적 비판으로 가득했다. 일제로부터 검열을 당해 삭제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4칸짜리 연재만화가 처음 등장한 때는 1955년 무렵이다. 1954년 7월 13일 한국일보가 미국 가정만화 ‘블론디’의 연재되자 한국 만화가들의 시도가 이어졌다.

그 결과 김성환의 ‘고바우영감’(동아일보), 김경언의 ‘두꺼비’(경향신문), 김기율의 ‘도토리’(서울신문), 신동헌의 ‘주태백’(연합신문) 등이 4칸 연재 만화로 등장했다. 이후 동아 김성환 화백은 1958년 이른바 경무대 똥통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경무대에서 근무하는 똥을 치는 사람도 권력이 있다는 풍자였다.

박정희 군부 시절에도 1972년 서울신문에 ‘까투리 여사’를 연재한 윤영옥 화백이 새마을 운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는 등 수많은 시사만화가들의 고난이 있었다고 한다.



   
 
  ▲ 이주노동자 문제를 그린 박재동의 ‘내 방으로요’. 산업재해로 손을 잃고도 강제출국이 두려워 내방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의 풍자다.  
 
그후 1987년 6·29선언 이후 박재동 화백이 새롭게 스타로 떠올랐다. 언론기본법이 국회에서 폐지되면서 신문은 4·19 이후 27년 만에 자유로운 발행을 할 수 있게 됐고 시사만화도 전성기를 맞는다. 당시 박재동 화백의 1컷 만평은 사회면 기사보다 인기가 높았을 정도라고 한다.

한국 시사만화가 ‘4컷 만화’에서 ‘한컷 만평’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시사만화가의 세대교체도 급속히 진행됐다.

한국의 시사만화가 단체는 1995년 창립된 한국시사만화가회가 최초다. 이후 이들의 보수적 시각에 불만을 가진 진보적인 시사만화가들이 2000년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를 탄생시킨다. 나아가 외연을 확대해 2006년부터 전국시사만화협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현재 시사만화가로는 신경무(조선일보) 손문상(프레시안) 서민호(국민일보) 김용민(경향신문) 백무현(서울신문) 장봉군(한겨레) 김경수(내일신문) 배계규(한국일보) 권범철(노컷뉴스) 화백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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