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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규찬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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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하루가 못 되는 짧은 일정으로 라이스가 한국을 찾았다. 말 그대로 번갯불에 콩 볶듯 바쁜 걸음이다. 중국 가는 길에 잠깐 들렀을 수 있겠으나, 여기 저기 기사를 살펴보면 그래도 꽤 다급한 용건이 있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독도와 교과서 문제 등으로 한참 속상해 있는 우리 면전에 대고 미국은 일본의 안보리 진출을 지지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 만해도 그렇다. 눈썰미가 없어도 한참 없다. 오만한 제국 출신이라 자신이 방문할 집 형편이 제대로 눈에 띄지 않는 걸까? 쓸데없는 분란 일으키지 말고 미국이 이끄는 ‘미래지향적 삼각체제’에 협력하라는 식의 뉘앙스다. 그게 옳고 또 좋다는 일방적 판단이 깔려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노 정권의 최근 강경 발언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불쾌감의 표현이 아닐지 모르겠다. 회견장에서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어떤 국내 기자의 질문을 그녀는 정치인 특유의 유연함으로, 보다 정확히 말해 초점과 한참 어긋난 공허한 수사로 처리해 버린다. 미국 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압박할 때는 농무성 장관 역을 맡다가, 용산 한미연합사 지휘통제소를 찾을 때는 국방부 장관으로 변신한다. 정말 놀랄만한 슈퍼 우먼이다.
개인적으로 미 라이스 국무장관을 잘 모른다. 만난 적 없고, 앞으로 만날 가능성도 거의 없을 것 같다. 다만 제국의 경영을 책임진 장본인이니까 그녀의 움직임을 이렇게 주시하게 될 따름이다. 신문과 방송에 잠깐 비친 모습에서 최대한 그녀를, 그녀가 이끄는 부시 행정부를, 그 내부 네오콘의 의중을 나름대로 읽어보고자 한 것이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흔적에서 의미의 단서를 찾는 것은 미디어문화연구자로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문화가 정치와 만나는, 문화연구가 정치(학)에 개입하는, 문화정치적으로 중요한 실천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기호로, 담론으로, 텍스트로 제국을 독해하다! 물론 헛짚을 수 있고, 과잉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작은 기호학적 기술이라도 최대한 이용하는 게 거대 제국의 의뭉한 통치 전략에 맞서 나, 우리 ‘인·민’의 평등·평화·평온한 삶을 보호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제국의 선전에 놀아나지 않고, 거꾸로 제국을 갖고 노는 전복적 놀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볼 때, 그녀가 핵 공격에도 끄떡없다는 ‘탱고’라는 이름의 극비군사시설을 한국 방문의 첫 일정으로 선택한 것도 특정 상대에게 특정 의미를 발생시키고자 한 고도의 전략적 기호 행위로 읽힌다. ‘민주주의증진법안’이라는 것을 통해, ‘불량국가’나 ‘폭정의 전초기지’와 같은 담론을 통해 얻고자 하는 북한 위협의 효과와 의미론적으로는 연속선상에 있는 행동이 된다.
그녀가 이대 여학생들을 만난 것도 비판적 해독의 대상이다. 여성과 여성의 만남, 백인 아닌 이른바 지적인 ‘유색인종’ 여성들 간 즐거운 표정을 담은 사진은, 만약 맥락에 관한 현장 취재보도가 없었다면 꽤 많은 ‘동일시’ 효과를 냈을 것이다. 너희와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신화를 제조하면서 제국과 그 ‘혈맹’ 사이 현존하는 비대칭적 관계를 절묘하게 위장하는 듯 했다.
그러나 결국 이벤트는 실패로 돌아갔다. “미래의 한국 여성 리더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요청에 따라 미 대사관 측이 준비했다지만, 공항에 도착한 라이스가 대기 중이던 학생들과 이야기 나눈 시간은 5분에 불과했다.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대화가 가능한가? 활주로 위에서 대화를 갖겠다는 발상이 애당초 얼마나 진지할 수 있겠는가?
의심은 계속된다. 혹 진짜 원했던 것은 만남 자체가 아니라, “한미관계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는 인상을 국내 독자들에게 남길 수 있는 바로 그 사진 한 장이 아니었을까? 기념촬영을 위해 동원된 듯 했다는 일부의 증언은 이런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값싼 쇼의 이미지 플레이를 무효화시키기 충분했다. 자신도 학생들처럼 동원·조작된 것 같은 불쾌감을 느낀 시청자, 독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소프트파워는 비록 강력하지만, 늘 주변에 통하지는 않는다. 들통 나기도 하고, 적대적으로 읽혀질 수도 있음을 과연 제국의 그녀는 눈치 채기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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