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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규찬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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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 이야기>가 있다. 에가와 타쓰야라는 일본 만화가의 작품으로, 발행되는 즉시 국내에 번역 소개되고 있다. 지금까지 총 12편이 나왔다. 평소 만화를 즐겨 읽는 문화연구자로서 책은 가히 충격적이다. 매 권마다 긴장을 놓지 못한다. 짧은 지면에 그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직접 읽어 보길 권한다. 책은 ‘일본 작가의 시각에서 그려진 작품’ 그 이상이다. 집단기억, 역사 재구성의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 <러·일 전쟁 이야기>는 일본 근현대사의 전쟁 경험을 새롭게 영웅적으로 조명하는 문화적 텍스트다. 타자의 삶과 타지의 역사까지 자신의 시선에 따라 재구성코자 하는 문화정치적 기획의 중대 징후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그 타자란 제목에 적힌 러시아가 아닌, 오히려 가까이 위치한 조선이다. 조선은 문명의 빛이 들지 않은 야만의 무대고, 따라서 삶 즉 문화란 개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조선 민중은 근대화된 일본 주체의 응시를 받는 익명의 타자에 불과하다. 갑신정변에서 구체화된, ‘탈아론’을 내세운 일본의 개입은 갑오농민혁명을 거쳐 마침내 청일전쟁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이때의 청일전쟁은 무력 침략이 결코 아니다. ‘일본을 위한, 아시아를 위한 의로운 전쟁’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가 부가된다. 조선 민중의 저항은 거꾸로 “우리 군의 동향을 청나라 쪽에 알리는 조선인 스파이”의 짓 쯤으로 전락하며, 물자 수송을 거부한 한 조선인은 “일도 제대로 않고, 돈만 뜯어내고 식량을 들고 튀는 놈”으로 비하 묘사된다.
만화책 한 권 갖고 뭐 그리 호들갑이냐 할지 모르겠다. 애들이 재미로 읽는 만화에 지나치게 과민 반응하는 것은 아니냐고 시비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원래 재미로 은폐되어 있음이랴! <침묵의 함대>나 <정치 9단>과 같은 일본 만화를 본 독자라면 그 말뜻을 알 것이다.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라는 만화책에 왜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토록 큰 의미를 두는지 생각해보자. 만화는 명백한 정치적 텍스트이자 이념적 담론이다. 소위 ‘자학사관’을 극복하자는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핵심 구성원들이 바로 만화가고, 그 뒤틀린 우익 논리는 다름 아닌 만화책을 통해 일본 청소년들의 부진한 역사의식을 파고들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CIA가 칠레 아옌데 정권을 폭력으로 뒤엎을 때, <도널드 덕>이라는 만화가 이념 전파, 선전의 결정적 매체로 활용되었지 않던가? <러일 전쟁 이야기> 속의 친숙한 그림, 친밀한 언어를 통해 왜곡된 역사는 양국 미래 세대의 무의식 깊이 파고든다. 일본 내 결코 소수가 아닌 세력의 제국에 대한 욕망, 식민에 대한 기억은 바로 이렇게 작동한다. ‘한류’로 흥분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한일간 문화 흐름의 현실을 짚고 그 전망을 말해야 하는 기자들이 관심 가질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확한 판단 없이 미래의 사회적 상상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최근 국내 신문과 방송의 한일관계 조명 방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경쟁 보도의 한계가 명백하다. 감정적 수사로 가득할 뿐, 양국 민중의 관계 변환을 위한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는 보이지 않는다.
과잉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국가주의로 포장된 보수 매체의 선정적 보도는 양국의 평등하고 평화로운 미래에 방해가 될 뿐이다. 일본 우익을 정치뿐 아니라 문화와 매체 등 층위에서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아울러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국내 우익의 이중적 태도다. 반일 포퓰리즘을 조장하면서 막상 ‘자학사관 극복’의 뒤틀린 논리를 모방하는 아류적인 움직임이 최근 도드라지고 있다. 해협을 가로 지른 한국과 일본 우익의 묘한 이념적 연대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출판사를 소유한 <산케이 신문>만큼이나 위험한 <러일 전쟁 이야기>, 그리고 우리 사회 내 우익의 역사 왜곡 움직임을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한참 뜨고 있는 韓流보다는, 깊숙이 내재해 있는 寒流의 모순을 공부하는 게 훨씬 긴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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