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사설이 초라해졌다. 독자들에게 사설이 화제로 오르지 못하고 있다. 젊은 독자들은 신문 지면을 정보위주의 탐색을 하며 읽는 재미를 추구한다. 청년독자들에게 사설은 그저 제목으로만 일별되는 도외시의 영역이다. 중장년층 독자는 이와 다르다. ‘사설의 추억’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반세기전 우리 사회 곳곳에 계몽의 빛이 와 닿아야 할 때 사설은 ‘한국의 등대’였다. 독재의 억압적 권위주의가 발호 할 때 사설은 한줄기 양심의 가느다란 소리였다. 민주주의가 휘청거리는 경향각지서 그 여린 음향의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신문의 향기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사설을 ‘신문의 심장’으로 여기는 근거가 그것이었다. 민주와 자율이 어느덧 사회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요즘 사설은 그 권위의 빛이 바랬다. 지면의 시렁 위에 얹혀져있지만 이젠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신문 사설이 조각나 있다. 사설은 오랜 기간 우리 말살이의 길잡이였다. 한글이 아름다운 이유를 밝혀주는 증거였다. 사설의 귀한 언명이 인간과 사회를 명명하며 규정한다는 확신을 가능케 했다. 그런 사설이 왜 날카로운 유리조각으로 변해버렸을까. 이미 청소년들은 한국 신문 사설들을 한국어 ‘논설문의 교범’으로 배우지 않는다고 고교 선생님들은 밝힌다. 글의 향기 덩어리가 아니라 오직 저주와 비판적 비아냥만 판친다는 주장마저 나와 있다. 사설은 얼마든지 세상의 판관역할을 할 수 있다. 신문 사설 집필자가 다루지 못할 것은 없다. 군사독재가 횡행했던 시기, 주필과 논설위원들은 다루지 못하는 그 금기에 대해 얼마나 고뇌했던가.
말과 표현이 막힘이 없어 오히려 현기증이라도 날 요즘, 사설은 왜 흔들리는가. 지상최대의 표현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사설은 경박해지고 상대를 찌르는 칼날로만 머물고 있다. 권위주의의 무장 해제로 언론의 자유가 확연할 때 사설란이 탈권위의 권부를 향해 너도나도 쟁쟁거리며 쏟아 부었던 ‘비판의 십자포화’는 역으로 사설이 무력해지는 최악의 자충수였다. 칼은 칼집에 머물 때 가장 무겁고 무섭다. 칼은 덕과 밝은 철학으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정보통신 혁명시대, 1등의 스피드가 즉시 표준화되는 디지털 시스템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설은 이때 잠시 속도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일간지의 속보성 보도 마냥 공격적 일진일퇴를 거듭해야하는 것이 사설의 본령이 아니다. 작금의 사설 헤드라인을 보라. 온갖 날카로운 주장이 신문사의 경향성에 버무려져 날 것으로 생경하다. 원고지 900자 남짓 평균 열다섯 개의 문장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있다. 그러니 문리(文理)가 제대로 안 선다. 대안 제시는 언감생심이다. 사회 곳곳을 헤아린다는 사설란 3개의 ‘사설 삼총사’는 전략 전술을 호령하는 장군 지위라기보다 변방의 병졸 같다.
사설은 진득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판단하는 최후의 심판관 노릇을 해야 한다. 사설의 문리는 더 길고 유장해야 한다. 긴 호흡으로 우리 갈 길을 감동 깊게 그려주어야 한다. 사설은 우리 지적 풍토의 풍향계이다. 역지사지하지 못하는 한국의 논쟁 토대를 사설이 닮아갈 필요가 있을까. 전후사정의 맥락을 무시하고 오직 필요한 선정성만 잘라내 내세우는 글 줄기는 한나절만 지나면 힘을 잃고 만다. 엄정한 비판은 대안의 향방을 암시해줄 때 빛난다.
수십 년 전 논설 집필자가 피와 땀으로 썼던 사설을 채록한 빛바랜 스크랩을 오늘 펼쳐보는 것처럼 수십 년 후 누군가는 오늘 인쇄되어 나온 수많은 사설들을 모니터로 검색해볼 것이다. 이 다종다양한 사설들이 봄기운 물씬한 언어의 글밭에서 역사로 차곡차곡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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