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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욱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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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 의한 정치의 식민화. 독일 정치학자 토마스 마이어가 쓴 책 ‘미디어크라시’(Mediokratie)의 부제다. 정치가 식민화되어 미디어에게 그 ‘주권’을 내 주었다는 것은 정치가 미디어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한국의 경우 아직 정치의 식민화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치에서 미디어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디어 선거였다고 평가되는 17대 총선에서 이른바 ‘감성의 정치’가 힘을 얻은 것이나, 국회 활동에서 상징 싸움과 폭로성 발언의 비중이 커지는 것도 이러한 변화의 방증들이다.
기능이 확대된 미디어는 ‘행복해 지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것일까? 미디어 기업에게는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서 활동하는 주체들, 특히 저널리스트들은 그렇지 못하다. 상업화된 미디어를 지배하는 코드는 수용자의 주목(attention)이다. 어떤 내용이든 주목을 끌 수 있으면 내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폐기한다. 이데올로기, 문화 정체성, 정치적 영향력, 사회적 파급효과 등은 모두 부차적인 기준이 된다. 수용자의 주목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저널리즘이 경제 시스템의 한 하부시스템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디어 성격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정치에도 마케팅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책 결정 단계부터 홍보 전문가가 참여하는 미국이 이 점에서 가장 앞선 것 같다. 그곳 전당대회는 거대한 텔레비전 쇼에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마케팅이 유일한 대안이 아니며, 바람직한 방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쇼 비즈니스가 된 정치판에서 진지한 정치와 정치가는 실종되고 노회한 연출과 겉만 번지러한 춤꾼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다른 대안은 미디어 정책이다. 분화된 사회에서 정치는 사회통합의 유지에 필요한 조율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정치가 미디어 내용에 직접 영향을 주기는 힘들어 졌지만, 미디어가 활동하는 조건을 조율하고 구성하는 힘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정치권이 그 힘을 각자에게 유리한 미디어 조건을 만드는 싸움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결국 모두 패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 보다는 정치가 미디어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공영방송이 저쪽 편이라고 해서 약화시킬 것이 아니라, 제 역할을 하도록 키워야 한다. 거대 신문이 통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부당한 방해를 한다고 해서, 신문산업을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정치가 느끼는 억울함과 답답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 외에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등 모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시장기능, 즉 활발한 경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논의가 가능한 미디어 질서를 만드는데 모든 정치세력이 머리를 모아야 한다. 그러한 노력의 효과는 더디게 나타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빨리 시작해야 한다. ‘미디어위원회’ 같은 기구가 이러한 논의를 위해 적절한 장으로 보인다. 이 위원회는 사회적 의사소통 구조라는 측면에서 미디어 현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미디어 정책적 제안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위원회의 구조는 그 제안이 국회와 정부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는 방식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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