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C 최대사건 80년 언론통폐합] 신군부 강제로 46개사 문닫아

사주 위협해 포기각서 받아 모든 방송사 정권이 장악, 지방지 1도1사 원칙으로 처리 중앙지 1개 경제지 2개 사라져

5공화국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폭압적인 방법을 동원, 언론을 탄압했다. 체제 저항적 언론인을 강제로 대량 해직한 5공 정권은 80년 11월 한국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폭거를 강행한다. 한국 언론을 10년 전으로 후퇴시켰다는 언론사 통폐합 조치이다. 언론계 판도를 뒤바꾼 이 조치로 전국 64개 언론사 가운데 14개 신문사, 27개 방송사, 7개 통신사의 매체가 통폐합되었다. 중앙일간지는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흡수·통합돼 7개지에서 6개지로 줄었으며 경제지도 종래 3개지에서 매일경제 현대경제 2개지만 남게 됐다. 서울경제는 한국일보로, 내외경제는 코리아헤럴드로 통합·폐간됐으며 현대경제는 전경련이 인수해 한국경제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던 것이다. 지방지의 경우 이른바 '1도 1사' 원칙에 따라 기존 15개이던 신문이 10개로 줄었다. 통신사는 동양·합동통신이 연합통신으로 통폐합되고, 시사·경제·실업통신 등 3개사는 폐간됐다.



방송사는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의 2원 체제에서 공영방송 단일 체제로 변화, 정권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동양방송(TBC)의 TV와 라디오, 동아방송(DBS), 서해방송 및 전일방송(TBC 네트워크로 별도 법인체), 대구한국 FM 등은 모두 KBS로 흡수됐다. MBC의 21개 지방사는 51%의 주식 양수를 통해 지방망 계열화로 재편됐으며 CBS는 보도 기능이 일체 없어지고 순수 복음 방송으로 개편되는 길을 가야 했다.



5공 정권은 이와 함께 서울신문 경향신문 연합통신 MBC의 주식을 대량 인수하는 방법으로 언론을 장악했다. 공영방송인 KBS는 MBC 주식 70%를 소유하게 만들었고 서울신문 99.4%와 연합통신 42.4%의 주식을 정부가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언론통폐합 과정에선 또한번의 언론인 대량 해직이 뒤따랐다. 통폐합에 앞선 대량 숙정에서 717명의 언론인에 이어 '언론사 구조 개편'이란 통폐합 과정에서의 305명 등 모두 1000여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직됐다.



언론 통폐합은 형식상 신문협회와 방송협회의 자율결의란 명분으로 이뤄졌다. 80년 11월 14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채택한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은 전국 신문·방송·통신사의 통폐합 계획을 알리는 내용이다. 결의문은 "우리나라에는 구미 각국과 비교해도 너무 많은 신문·방송사가 난립하여 왔으며 이로 인해 언론이 각계 국민에게 본의 아닌 누를 끼쳐왔고 사회적 적폐 또한 적지않았다"며"언론기관의 과점화는 공익에 배치되므로 개인이나 특정 법인이 신문과 방송을 함께 소유함으로써 민주적 여론 조성을 저해하는 언론구조는 마땅히 개편돼야 한다"는 강변이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자 언론 통폐합은 국민과 언론을 우롱한 결과였음이 밝혀졌다. 언론대학살이 있은 지 8년만인 88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언론탄압의 발상·계획·입안·추진 책임자에 대한 집중 추궁으로 시작된 진상규명 작업은 그해 11월 21일 언론청문회 개최로 이어졌다. 그러나 언론청문회는 4대 일간지 사주들의 개입 의혹도, 언론대학살극의 입안자도 밝혀내지 못한 채 '집행자'인 허문도 씨(당시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장) 만이 기소되는 선에서 봉합됐다.



언론대탄압이 초법적인 강압과 협박에 의한 것임이 확실한 증거를 통해 밝혀진 시기는 93년 11월 3일이다. 5공 당시 언론 통제의 전위부대 역할을 한 보안사 언론대책반에 파견됐던 문공부 홍보연구관 김기철 씨는 '언론사 포기 각서' 원본을 공개했다. 김씨는 81년 1월 언론대책반이 해체된 뒤 10여 년 동안 비밀리에 간직해온 45개 언론사 사주들의 각서 총 52장을 중앙일보에 전달했다. 사주들의 친필로 쓰여진 52장의 각서는 내용과 형식은 물론, 작성 시점도 80년 11월 12일로 동일하다. 게다가 사주들이 도장이 아닌 지장으로 날인한 점은 강제 연행돼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포기 절차가 이뤄졌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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