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조각 같은 말들이 넘쳐난다. 후벼파는 언어가 화살로 총알로 날아다닌다. 잔뜩 경직된 말에선 적개심이 묻어난다. 오직 상대방을 겨눈 비난이 횡행한다. 맹목적 단죄의 언어 전쟁이 우리 곁에서 매일 지속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기자의 말이 무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무기는 혼돈을 정리하는 지성의 날카로움이 아니다. ‘너의 진영’을 겨냥한 ‘나의 진영’의 화살과 창으로 번득인다. 객관성을 가장한 뉴스는 작위적인 리드로 이미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인용되는 전문가의 따옴표 발언은 맥락에서 거두절미 일쑤다. 맞춤식 제목들은 ‘너의 진영’을 초토화시키려는 ‘적의’로 바짝 날이 서있다. ‘전투적 출사표’를 방불케 하는 정치적 칼럼의 서술은 이젠 식상하리만큼 도식적이다.
800자 짜리 스트레이트기사가 전투의 서막을 고하고 1200자 짜리 해설박스가 이것저것 싸잡아서 ‘비아냥의 대포’를 쏘아댄다. 위아래 각 900자 짜리 ‘사설 3총사’는 언어의 교범으로서 위대한 한글의 품격에서 종종 비켜나 있다. 채 스무 개도 되지 않는 문장들로 이미 경박해진 사설은 대안 없는 비판으로만 만사가 재단된다. 어느덧 사설란은 시대를 밝히는 한글의 고갱이 역할에서 빛이 바래고 있다. 사설은 경박한 칼날을 거두고 깊이 있는 의미설정과 격려의 향기로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1분30초 가량에 불과한 방송뉴스 리포트 한 꼭지는 변죽만 울리는 말로 반복된다. 서론은 거창하지만 본론은 미약하고 결론은 공허하다. 뉴스 수용자의 정서적 자극만을 노린 언어의 편집과 이미지 분식은 상식으로부터도 멀어져 있고 지성과는 반대편에 처해있다.
어느 사회건 어느 국가이건 뉴스는 넘쳐난다. 이미 21세기는 시민 민주주의에서 ‘미디어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매체의 그릇에 담길 뉴스 내용물은 늘 격랑이고 넘실거린다. 그래서 세상은 언제나 야단법석인 냥 보인다. 세계 어딜 들여다봐도 경기침체를 놓고 논쟁한다. 성장과 복지라는 두 명제를 놓고 실질적인 공박을 한다.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이라크 파병을 놓고 갑론을박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심지어 미국의 심장부에선 더 치열하다.
저들의 논쟁엔 무게가 있고 공박엔 논리가 갖춰져 있다. 끝 간 데 없이 생경한 좌파 우파 논쟁을 함부로 하지도 않는다. 오직 국익을 맨 앞에 놓고 국민적 에너지 총량의 확대를 고민한다. 다만 방책을 찾아가는데 좌파적 우파적 방법론을 놓고 그 효율성을 따져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각론이 풍부하다. 누가 시장경제를 부정했던가. 누가 이 대한민국 이 나라 이 겨레를 부인한 적이 있던가. 이미 대전제로 성립되어 있는데 그 대책 없는 까탈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 공동체가 곧장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냥 가득 펼쳐진 비관의 단어와 저주에 찬 탄식이 과연 한국인을 행복하게 하는 뉴스의 정도란 말인가. 우리는 하지 않아도 될 비생산적 ‘자학 뉴스’만들기에 지쳐있다. 나를 변치 않는 위치에 못 박아두고 너의 위치를 규정해버리면 오직 편견에 노출될 뿐이다. 뉴스는 도그마에 빠지고 언어는 날이 선다. 이때 너와 나는 하나 되기 힘들다. 다툼과 적대의식이 팽팽해진다.
나도 물처럼 흘러갈 것이고 너도 달처럼 변할 것이라고 역지사지한다면 세상은 달라진다. 언제든지 내가 그대의 위치로 갈 수 있고 그대가 내가 될 수 있다. 서로를 인정하는 품이 넉넉해지면 말이 살아나고 언어가 향기를 내품기 시작 한다. 나의 상대적 위치가 너의 상대적 자리와 맞물려 돌고 돈다. 상생의 물살이다. 이때 우리는 화이부동하면서 서로의 어깨를 보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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