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의 집단 실소




  전규찬  
 
  ▲ 전규찬  
 
<웃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르그송의 대표적 저서다. 그런데 그의 웃음에 관한 이론을 원래의 철학적 작업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베르그송은 칼 포퍼보다 훨씬 앞서 닫힌사회에 대한 비판적 경고를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규칙적 ‘관습’과 ‘전체의 이익’, ‘애국심’ 등의 명목적 가치를 내세운 닫힌도덕에 기초한 게 바로 닫힌사회이다.



이 닫힌사회의 주체는 부분적이고 기생적이며 표피적인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지적 능력은 불행히도 ‘지성이하(infra-intellectual)’에 머물기 십상이다. 경직된 사유로 인해 지정된 경계 바깥과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 이런 딱딱함의 기계화 경향에 대한 고발이 다름 아닌 웃음이다. 웃음은 자동화된 삶과 그 방심 상태에 대한 응징에 해당한다. 웃음으로써 민중은 닫힌사회의 닫힌도덕을 고발한다. 아울러 열린도덕과 그 위의 열린사회, 그리고 그 속의 심층 주체에 대한 의사를 집단으로 표시한다. 웃음을 통해 민중은 자신과 이웃, 사회와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비판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지난 9월 9일 우리는 또 한번 집단으로 요절복통 웃지 않을 수 없는 기회를 가졌다. 낄낄대며 넘어갈 그때의 웃음은 힘 있는 타자를 상대로 한 풍자, 조소인 동시에 민중 자타간 위무, 위안의 해학이기도 했다. 못 본 척 넘기기에 너무나 확연한 방심, 명백한 허점, 뚜렷한 구멍. 그래서 발생한 웃음은 보수 정치체제와 내부 기득권층,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의 행동을 자동화된 코드로 따르는 맹목적 신문들, 그 총체적 담합구조에 대한 통쾌한 보복이었다.



주요 일간지들은 1천5백여 인사들의 움직임을 일제히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어선 ‘원로’들의 ‘애국충절’에 불타는 행동으로 떠받쳤다. 우리 모두 새겨들어야 할 ‘어른’들의 지혜로운 말씀이라는 감동 섞인 수식어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자동화된 보도에는 심각한 빈틈이 있었다. 전례 없다는 숫자로 인상을 주고자 한 뉴스 생산자들의 기계화된 뉴스는 결정적인 방심으로 이어졌다. 결국 의도한 감동은 간데없고 실소만 남는다. 되살아난 80년의 악몽, 그 살인의 추억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웃음이 간절히 필요했다.



허문도씨는 ‘원로’라 자칭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시대의 고발자로 모시고자 한 일부 신문들의 자동 기계주의에 내포된 결정적 방심이었다. 80년 군부 쿠데타 직후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강제 해직의 주역 중 한명으로 생생히 기억되는 그는 ‘원로’의 정당성을, 이들을 떠받든 신문의 합법성을 한방에 무너뜨리는 구멍이었다.



그는 신군부에 봉사한 구 언론인일 뿐만 아니라, 현역 정치인이기도 하다. 2000년 자민련에 입당했을 때 ‘중앙일보’가 “신보수주의 합창”이라고 비꼰 인물이다. 경실련, 참여연대는 공천부자격자로 반대했다. 불교텔레비전 사장으로 선출되었을 때는 노조, 민교협 등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금방 물러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국내 대표적 보수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반미, 친북, 좌익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는 모임에는 그가 있다.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노무현 정치는 김정일의 연방제 통일에 야합하는 국가연합을 획책하려던 저의의 일단을 드러냈고” 어쩌고 하면서 신문에 실명으로 위악한 광고를 내고 계좌번호까지 알린 사람이다.



그 외에도 잠시 잊고 있던 얼굴들과 속속 대면할 수 있었다. 이 땅의 민중은 지성 이하의 존재가 아니다. 어리해 보일지 모르나 치열하게 역사와 분투하며 자유를 체득한 속 깊은 존재다. 허점투성이 명단을 내놓고 숫자로 위압하려는 이들의 자만, 그 오산에 태연스레 눈감는 기자와 논설위원들의 무지는 웃음만 살 뿐이다.



왜 그토록 닫힌사회에 집착하는가? 80년대 악몽의 시대로 하강하자는 것인가? 역사 진화의 다중적 욕망을 배신함으로써 민중의 비웃음을 자초하는 이념 기계적 자동주의, ‘우아함’으로 갱신할 여지는 정말 없는가?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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