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수사관들이 입을 열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작품을 만들라고 했다. 증거는 없고 고문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지난 74년 북한의 지령으로 대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된 관련 23명은 군사법원에서 8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15명은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형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시간만에 형이 집행되었다. 이렇게 유신체제는 정치적 광기를 부리면서 무고한 생명을 ‘사법살인’시켰다.
이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은 한 세대를 지나서야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그 피맺힌 진실의 한 조각을 드러냈다. 생명의 존엄성을 근본부터 부정했던 박정희 정권의 야만성이 너무나 늦게 판정 받았다. 유가족들이 당했을 고통과 공포는 그 무엇으로 보상될 것인가. 우리는 국가폭력의 한 전형을 21세기를 통과하고서야 밝혀낸 것이다. 구타 몽둥이찜질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통해 조작된 공판조서를 그대로 서면 검토해 사형을 확정시킨 당시 군사재판부와 대법원은 무엇으로 사법의 명예를 회복할 것인가.
바로 이즈음 우리 언론은 자괴감과 수치로 가득하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현장을 함께 하고서도 기록하지 못하고 진실을 파헤치지 못했다. 오직 정권행적의 공식적 기록자 또는 정권측이 넘겨준 자료를 들춰보는 필경사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국가권력 음모에 의해 인간의 권리가 철저히 파괴되는 역사적 치부를 당시 우리 언론은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인간다움과 인간의 권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우리 언론은 뒤늦게라도 아직 규명되지 못한 억울한 죽음들의 신원(伸寃)에 나서야 한다. 진정코 사회환경의 감시자라고 자임한다면, 왜곡되고 비틀어진 사태의 고발자로 나설 수 있다면 아직 어둠에 묻혀 복권을 기다리는 의문사 진실을 올바르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 숨쉬는 아픔들을 제대로 일으켜 세워 다시 기록해야 한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16일 21개월에 걸친 조사활동을 공식적으로 마감했지만 시간과 인력 부족으로 손도 대보지 못한 의문사 의혹들은 계속 규명되어야 한다. 의문사특별법 개정안이 일단 무산되었지만 국회는 다시 본회의에 상정시켜야 한다. 현재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도 특별법 개정을촉구하고 나섰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조사활동 재개에 나서는 것이 마땅하다. 국회는 이를 저지해서는 안된다. 한국기자협회 창립38주년 기념행사에서 이인호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이 한국언론을 향해 던진 고언은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많은 언론인들에게 자각의 울림을 주고 있다.
“언론의 기능을 혈액순환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피가 잘 순환하지 않는다면 민주적 사회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삶을 계속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언론의 작용을 피의 순환에 비교한다면 기자들은 피의 구성체인 혈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혈구들이 온전해야 피가 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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