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뜨겁게 이어지고 있는 ‘타다 공방’도 비슷한 문제다. 표면적인 모습은 타다의 서비스 실체가 자동차 대여사업이냐, 운송사업이냐를 둘러싼 논쟁이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국 막대한 투자를 한 기존 사업자의 기득권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 것이냐는 부분과 적잖은 관련이 있다. 물론 전통 산업의 기득권도 존중해야 한다. 혁신 서비스가 절대선이 아니듯, 기존 서비스 역시 절대악으로 매도해선 안 된다. 그들의 외침을 무조건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것도 위험하다. 따라서 이번 공방은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관점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섣불리 어느 한 쪽 편을 들기 쉽지 않다. 저마다 다 사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뒤늦은 휴가로 스페인을 다녀오면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자유 여행으로 다니다보니 단거리 이동 때 우버를 자주 이용했다. 국내에서 차량 공유 서비스를 이용할 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다. ‘요금 문제’나 택시 기사와의 소통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게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생소했던 ‘차량 공유’가 오히려 더 보편적인 느낌이 들었다. 반면 미터기에 따라 요금을 내는 익숙한 방식이 오히려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혁신 서비스를 바라볼 땐 사소해 보이는 이 차이를 주목해야 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편의를 제공하느냐는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우버가 등장한 이후 많은 사람들은 차량 소유의 종말을 이야기했다. 모바일 혁명으로 촉발된 다양한 혁신 현상을 ‘증발’로 표현한 로버트 터섹은 아예 “우버는 차량 소유를 증발시켰다”고 진단했다. 이런 진단엔 대체로 동의한다. 실제로 앞으로는 차량을 직접 소유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올 것이란 성급한 전망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난 오히려 더 주목해야 하는 건 ‘보편적 서비스’에 대한 상식의 증발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기술과 연결되는 순간 수십 년 동안 익숙했던 것들이 시대에 뒤진 불편한 서비스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에겐 파괴적인 존재로 보이는 혁신 서비스가 모바일 기기에 익숙한 신세대들에겐 상식적인 서비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타다’를 비롯한 새로운 모빌리티 서비스에 대해서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기존 상식을 지나치게 고집하기보다는 ‘소비자들이 열광하는 이유’에 좀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단 얘기다. 그래야만 19세기 영국 자동차산업의 성장을 가로막았던 ‘적기조례’ 같은 황당한 규제를 피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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