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된 저널리스트의 역할

[언론 다시보기] 진민정 저널리즘학연구소 연구이사

진민정 저널리즘학연구소 연구이사

▲진민정 저널리즘학연구소 연구이사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도, 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역할은 상처에 펜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저널리스트, 알베르 롱드르가 1929년 자신의 저서인 <칠흑의 땅(Terre d’ébène)>에 남긴 이 문구는 지금도 여전히 프랑스 저널리스트들에게 일종의 ‘행동강령’처럼 여겨지고 있다.


지난주에는 롱드르의 이 문구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1월17일자 매일경제에 실린 <평창 가는 첫 길목 ‘부끄러운 민낯’>이라는 제목의 기사 때문이었다. 평창올림픽이 다가오는데 KTX가 지나가는 용산역 주변 빈민가 때문에 국격이 훼손될까 걱정되므로 그곳에 임시 가림막이라도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빈곤이라는 우리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부끄러운 민낯”으로 규정하는 기사를 심지어 1면 톱기사로 배치한 언론의 ‘패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기사가 실린지 불과 3일 후인 1월20일은 용산참사가 9주기를 맞이한 날이었다. 도시 서민의 생존권이 국가 권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그날의 사건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용산역 주변 빈민가를 덮어버리자는 기사는 그래서 더욱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용산참사 당시 보수 언론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의 항의 농성에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대신, 물질이 사람보다 우선시되는 도시재개발 정책에 대해 비판했더라면, 공권력의 야만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약자의 편에 섰더라면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언론이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심지어 사회적 흉기가 되어 국가폭력이나 재난사고의 피해자들을 악의적인 보도로 공격하는 행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의 유가족에게는 보상금 액수 보도를 통해 ‘세금 도둑’ 프레임을 씌워 사안의 본질을 흐렸고, 백남기 농민에게는 ‘전문 시위꾼’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경찰의 물대포를 정당화하지 않았던가. 특정 지배 세력과의 이해관계에만 치우친 언론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교묘하게 이들을 고립시키는 행태가 거리낌 없이 자행된 것이다.


이로 인해 언론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사라진지 오래다. 많은 피해자들은 언론이 자신들을 ‘당해도 싼 존재’로 규정하는 행위만 하지 않아도 아픔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 토로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잊힌 듯하나, 롱드르의 주장처럼 저널리스트의 역할은 세상의 수많은 상처와 고통을 무참히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명하게 드러내고, 이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는 데 있다.


물론 지금처럼 저널리즘이 몰락하고, 뉴스가 클릭 장사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저널리스트들이 엄청난 노동 강도에 시달리는 시대에 이 무슨 사치스러운 주장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저널리즘을 거론할 때가 아니라 언론의 생존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단 한 가지만 요청하고 싶다. 저널리스트의 사명을 저버리더라도 적어도 괴물이 되지는 말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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