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문화예술계 인사 블랙리스트’ 작성에 이어 MBC와 KBS 장악을 기획한 문건이 공개됐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18일 원세훈 전 원장 재임 당시 국정원이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KBS 조직개편 이후 인적쇄신 방안’ 등 2건의 문건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 문건에 따르면 국정원은 기자와 PD의 성향을 사찰해 ‘좌파’로 낙인찍고, 정부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폐지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공작을 펼쳤다. 국정원이 국가안전보장 업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방송장악 문건을 생산한 것도 한심할 따름이지만 사찰이 없었다면 알기 어려운 기자와 PD의 실명과 정치 성향 등을 분석한 리스트까지 만들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원 전 원장의 직접 지시로 2010년 3월 작성된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향’ 문건에는 MBC가 좌파세력에 영합하는 편파보도로 여론을 호도해 국론분열에 앞장서고 있다며 △노영(勞營)방송 잔재 청산 △고강도 인적쇄신 △편파 프로 퇴출에 초점을 맞춰 근본적 체질 개선을 주문했다. 구체적으로 ‘노조 배후인물 및 최문순 전 사장 인맥 일소’ ‘파업 주동자는 적극적 사법처리로 영구퇴출 추진’ ‘PD수첩·MBC스페셜·후플러스·시사매거진2580 등 시사고발프로 제작진 교체, 진행자·포맷·명칭 변경’ 등이 담겼다.
2010년 5월28일 청와대 홍보수석실 요청으로 국정원 담당부서가 작성해 6월3일 보고된 ‘KBS 조직개편 이후 인적쇄신 추진방안’ 문건에는 ‘좌편향 간부 반드시 퇴출, 좌파세력 재기 음모 분쇄’라는 표현 등이 담겼다. 당시 용태영 취재파일 4321부장은 ‘새노조를 비호하고 반정부 왜곡보도에 혈안’, 이강현 드라마국 EP는 ‘좌편향 PD들과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편파방송 획책’, 소상윤 라디오국 EP는 ‘편파방송에 대한 자성은커녕 좌파세력 비호 골몰’ 등으로 묘사됐다.
사실상 사찰이나 다름없는 국정원 문건은 방송사 내부 관계자들의 협조 없이는 만들어질 수가 없다. 기자와 PD의 실명 등 상세한 인적 정보가 문건에 대거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 정보관(IO)들이 수시로 방송사를 출입하면서 내부자들이 전한 정보를 토대로 문건을 작성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국정원의 방송장악 공작에 KBS와 MBC 내부 인사들이 어떤 식으로든 협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국정원 방송장악 문건이 작성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대로 실행됐다는 점에서 등골이 오싹하다. 2010년 김재철 사장 취임 반대 총파업을 이끈 이근행 MBC 노조위원장은 불법파업 등의 이유로 고소됐다가 그해 6월 해고됐고, 국정원 문건에 ‘반정부 왜곡보도에 혈안’이라고 기술된 용태영 당시 KBS 취재파일 부장은 2010년 6월에 자리를 옮겨야 했다. 공영방송이 정보기관의 지시에 따라 기자와 PD를 인사하고 조직을 바꾸며 프로그램을 폐지했다니 보도지침이 횡행하던 유신시대도 아니고 이럴 순 없다. 국정원이 문건을 들이밀고 이래라저래라 지침을 내리면 경영진은 넙죽 엎드려 이행한 것이다. 국정원의 방송장악 문건 작성과 실행에 청와대가 관여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국정원 문건이 청와대에 보고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국정원 개혁위가 밝히지 않았나. 그런데도 당시 홍보수석이던 이동관씨는 “국정원에 지시 내린 적도 없고 보고받은 적도 없다”고 발뺌했다. 과거 정부 국정원의 방송장악 공작으로 공영방송을 정상화해야 하는 당위성이 다시 확인됐다. 검찰은 철저한 수사를 통해 국정원 문건이 어떻게 작성됐는지, 문건 작성에 협조한 방송사 내부 관계자들이 누구였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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