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광주 망월동 5·18 옛묘역이 그런 곳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찾은 그곳에서 마주했던 흑백사진 속 한 여성을 기억한다. ‘임신 8개월에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맞아 아이와 함께 사망.’ 작은 글씨를 읽어 내려가다 눈을 꼭 감고 뒷걸음질 쳤다. 초등학생인 내게, 끝도 없이 펼쳐진 드넓은 묘역에 묻힌 희생자들의 사연들은 너무 무서운 것이었다. 영화 속 이야기라 해도 믿기 어려운 80년 5월 그날의 실화가, 유가족들에게는 얼마나 큰 강렬함으로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을까.
80년 그날, ‘마음의 빚’을 지게 됐다고 고백한 한 배우를 만났다. “라디오 방송에서 ‘폭도들을 진압했다’는 아침 뉴스를 제가 들었어요. 그러고 이제 홀가분한 마음에 학교를 갔던 기억이 납니다. 참... 마음의 빚이라도 조금 덜 수 있는 그런 작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시절 왜곡된 보고를 믿었었고, 이후 진실을 알게 된 후 미안한 마음을 스스로 고백한 순간이었다. 너무 어려 잘 알지 못했다고 기억될 수 있는 어느 아침날의 사건을 ‘마음의 빚’이라 표현하는 배우의 모습은, 실로 존경심을 자아내게 했다.
“일개 배우가 어떻게 감히 세상을 바꾸겠습니까, 신념 때문에 선택한 작품들은 아니에요.” 10만원이라는 거금을 준다는 말에 외신 기자를 태우고 무작정 광주로 향한 서울의 택시운전사, 2017년 송강호의 선택은 광주였다. 또다시 현재 진행형인 아픔을 다루는 작품에 출연하게 되자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의 답은 단호했다. 거창한 신념을 갖고 사회적 메시지를 주기 위해 선택한 작품은 단 하나도 없었노라고. 그저, 평범하게 사는 이들이 역사의 비극 앞에서 희망을 찾는 이야기가 너무 끌렸다고 말이다.
그러고보면 송강호는 항상 그랬다. 인맥도 없고 가방끈도 짧은 가난한 변호사, 오로지 가족을 위해 살다가 밀정에 휘말리게 되는 조선인 출신의 일본 순사, 그저 맡은바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인 평범한 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기사 김만섭의 유일한 재산은 그저 택시 한 대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데모는 한낱 사치에 불과하다고 투덜대는 서울시민은 우연히 마주한 비극을 외면하지 않는 ‘시민’을 담아낸다. 그날, 광주의 이야기가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던 과정엔 대학생, 밥집 아주머니, 그리고 군인에 이르기까지, 직분은 달랐지만 시민 한 명 한 명의 힘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사코 영화로 세상을 바꾸려고 한 적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상식과 정의’를 꿈꾸는 평범한 시민을 표현해내는 ‘송강호표 작품’은 마법처럼 관객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재주가 있다. 외면했던, 잊고 있던 기억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 덕분에 관객들은 조금씩 변해간다. 어린 시절 기억 한 조각을 외면하지 않았던 배우는 그렇게 세상을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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