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영 KBS 사장 퇴진 요구가 거세다. 구성원들은 급기야 고대영 사장 지시를 거부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공영방송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운 작금의 현실에 책임지라는 것이다. 국민 신뢰를 바닥에 떨어뜨린 장본인들이 스스로 KBS를 위해 결단을 내리라는 촉구다. 물꼬가 터진 퇴진 요구는 세를 키우고 있다. 노동조합은 물론 기자, PD들까지 개인 이름을 내걸고 가세했다. 고대영 사장은 말을 아끼고 있다. 물러날 뜻이 없다는 의지로 읽힌다.
고대영 사장 취임 이후는 비정상의 압축판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언론들이 앞다퉈 특종을 발굴할 때 ‘최순실이 측근 맞냐’며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눈감았다. 탄핵과 특검 수사로 국민들의 관심이 뜨거울 때 헌재와 특검보도를 축소했다. 태극기 집회를 띄우며 기계적 균형을 맞추기에 급급했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국정농단 심판’을 외칠 때 KBS는 겉핥기 보도에 그쳤다. 촛불이 있어야 할 자리엔 북풍 뉴스가 차지했다. 촛불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광장에서 쫓겨나야 했다. 국민들은 등을 돌렸다.
사장에 충언을 해야 할 간부들은 편향된 사고로 내부 반발을 불렀다. 프로그램 고정 패널 명단을 받아본 어느 간부가 “좌빨이 아닌 이유를 5가지씩 적어보라”고 했다는 노조의 증언이 나왔다. 또 어느 간부는 경제전문가 선대인씨와 맛 칼럼리스트 황교익씨를 출연 금지시켜 KBS 내부에 ‘블랙리스트’ 논란을 자초했다. 편향된 시각이 있는 패널이라면 내부 기준에 근거해 합당한 조처를 취하면 될 것을 자의적인 판단으로 처리해 마치 마녀사냥을 하는 듯한 행태를 보였다. 이뿐 아니다. KBS 보도에 압력을 행사한 이정현 녹취록 파문이 번졌을 때 KBS는 침묵했다. 대신 침묵을 비판한 기자에겐 가혹했다. 내부 인사규정까지 어겨가며 제주로 ‘유배’보냈다. 이 모두가 상식과 거리 먼 비합리적 결정으로 점철됐다.
권력을 감시해야 할 본분은 팽개치고 내부 감시에만 열을 올리는 고대영 사장과 일부 간부들의 일탈된 행동이 지금의 사태를 부른 직접적 원인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 동안 KBS가 ‘국민의 방송’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면, 내부 비판에 귀 기울이고 공정방송이란 신념을 지키고자 했다면 오늘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책임의 경중을 따지자면 당연히 조직을 이끌고 있는 사장과 간부들의 몫이 크다. 하지만 사장과 일부 간부의 퇴진만이 KBS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고 보지 않는다. 사장 퇴진은 KBS가 새로 거듭나는 첫 걸음일 뿐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뿌리 깊은 적폐를 도려내는 대수술이 필요하다. 사장이 물러났다고 KBS가 하루아침에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 한번 허물어진 신뢰를 다시 쌓으려면 지금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신뢰회복의 시작은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국민들이 KBS에 무엇을 바라는지 들어야 한다. 조직 혁신도 뒤따라야 한다. 미디어 격변기에 KBS가 저널리즘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
모처럼 KBS에 활기가 넘친다. 사장 퇴진을 요구해서가 아니다. 지난 시간을 성찰하고 위기를 돌파하려는 의지를 읽어서다. 성명의 무게가 남다르다. “KBS는 오랜 시간 공정성을 앞세워 침묵했고 중립성 뒤에 숨어 나팔을 불었다. 사장은 정권의 잘못을 은폐하고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려 했다. 간부들은 반공영적인 행태에 적극 일조 또는 방조했다. 우리는 그 옆에서 스스로 검열하며 침묵했다. 모두가 공범이다.” 지난 26일 PD 36명의 성명이다. 언론의 자유는 스스로 지키고자 할 때 힘을 가진다. KBS가 지금 그 길에 섰다.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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