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언론이 또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강남역 살인사건’ 보도 과정에서 스스로 드러낸 ‘젠더 감수성’의 민낯 때문이다. 어쩌면 단순 사건사고 기사로 잊혀졌을 지도 모르는 한 20대 여성의 피살 사건이 사회현상으로 확대된 것은 언론에 대한 대중들의 큰 불신이 터지면서였다.
분노서린 추모 열기는 문제적 보도에서 시작됐다. 화장실에서 살해된 23세 여성 소식을 전하면서 한 언론사가 ‘강남 화장실녀’라는 제목을 달았다. ‘트렁크녀’ ‘대장내시경녀’처럼 피해자를 되레 비하하는 ‘○○녀’같은 혐오적인 표현을 쓰는 문제는 이번에도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희생자에 대한 예의를 망각한 언론을 대신해 시민들이 대신 포스트잇과 국화를 들고 강남역 10번 출구로 모였다.
이후 경찰 수사결과를 보도하는 과정에서도 피의자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며 ‘이입’하는 태도를 보였다.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는 그의 말은 검증된 범행 동기인 것 마냥 보도를 통해 확산됐다. 한 언론은 ‘매슬로우 4단계 욕구설’까지 근거로 들면서 인정욕구에 목마른 피의자의 심리를 애써 설명했다. 피해자의 미래보다 가해자의 꿈을 더 궁금해하는 기사도 다수였다. <“교회 여자들이 무시해 여성 혐오증 생겨”…강남역 살인사건 피의자, 신학대 출신>같은 제목이 독자들의 ‘클릭’을 유도했다.
피의자가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흉기를 들고 여성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는데도 언론은 굳이 ‘묻지마 살인’이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여성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여성들의 외침은 <강남역 남녀 격한 대치…추모객 눈살 찌푸려>같은 기사들이 물타기를 했다. ‘왜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느냐’는 남성으로서의 불쾌감이 여성들의 절박한 위기감과 과연 등치될 만한 것인가.
오늘날 잇따라 벌어지는 여성 대상의 ‘묻지마 범죄’의 업보 중 일부는 언론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의 경우처럼 피해자를 비인격화면서 대상화하고, 가해자의 감정에 이입하며, 명백하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임에도 ‘여성혐오’라는 문제제기를 집단 히스테리마냥 무시하고 삭제 처리해왔다. 결과적으로 ‘묻지마 범죄’의 최상의 타깃이 여성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성이 살해되면 왜 그 시간에, 혼자, 술을 마시고, 놀다가, 옷차림이 야해서, 남자를 무시해서, 담배를 피워서, 고급차를 몰아서, 충분히 조심하지 않아서, 비싼 명품이나 걸치고 다녀서, 왜 이목을 끄는 짓을 해서, 조신하지 못해서 같은 온갖 핑계가 붙을 만한 ‘여지’를 언론이 알아서 내어준 꼴이 된 것이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 이입하는 ‘관음적 구도’가 빚어낸 결과다.
이는 저성장·저소득·고실업률의 미래 없는 사회에서 폭발할 것 같은 대중의 혐오가 배출될 밸브로 ‘여성’을 타깃으로 삼아도 된다는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양성평등 감각이 결여된 언론이 ‘클릭수 장사’에까지 현혹되면서 사회통합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언론이 여성혐오라는 만연한 문제를 직시해야만 하는 것은 여성혐오가 대중문화와 사회관계망을 타고 강화되는 ‘악순환’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을 비롯해서 뉴스유통의 주요 통로가 된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의 여성혐오 콘텐츠 문제는 ‘일간베스트’에 버금갈 정도다. 여성 대상 폭언과 폭력이 ‘오락’처럼 소비되고 있다. 이제 누군가가 또 무차별적인 ‘여성혐오’로 피해를 입는다면 언론은 결코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내부 규율을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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