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햇살이 말없이 지나는 언덕과 길목들은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익숙했다. 복작복작한 서울에서 가장 천천히, 그리고 느릿한 풍광을 간직한 동네. 매력적인 공간들이 늘 그러하듯, 낯선 카페와 저택들이 하나 둘 들어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직 부암동에는 느릿한 걸음들이 어울린다. 취재가 일상이 된 하루하루, 많은 것이 그저 익숙해져 용기와 생각들이 빛을 잃어가던 지난해 봄이었을 거다. 나를 두근거리게 했고, 누군가와 나누고픈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준 부암동은 그렇게 강렬하고 깊은 기억이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다시 부암동 언덕을 올랐다. 바람이 찬 탓인지 사람도 차들도 드문드문 보이던 종로의 산자락을 향하는 길, 더 고요해서 좋았다. 메마른 가지에 핀 개나리를 보고 행복해했던 이른 봄날을 생각했다. 소소한 발견이 삶을 채워나가는 기쁨을 알아차렸던 그날의 첫 마음이 떠올랐다. 고요한 골목길을 걷다 언젠가를 위해 남겨뒀던 어느 갤러리에 그 마음을 다시 찾으러 갔다.
하루 종일 양을 치던 아버지와 아들에게 주어진 찰나의 휴식시간. 폐타이어를 굴리는 맨발의 아이. 몇 평 남짓한 작은 갤러리의 흰 벽에 걸린 흑백의 사진들과 마주했다. 아이를 안고 30리길을 걸어 장에 다녀오는 라자스탄의 여인의 행위를 누가 단순히 삶을 위한 노동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결국엔 ‘사람’을 이야기하는 ‘같은 길’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를 지탱하는 건 결국 위대한 민중들의 소박한 순간들이 아닐까. 사진과 시와 그림과 글에는 결국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있다면 사진이든 그림이든, 몸짓이든 모든 건 예술의 하나다. 부암동 언덕의 라 갤러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흑백사진 속 노동현장은 관객의 눈길을 강렬히 사로잡는 그 무언가는 아니다. 그러나 일상의 경이로움을 쉬이 감사하지 못한 나를 다시금 마주하게 했다.
‘더디 가더라도 함께 손잡고 나아가기를. 함께 가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기를. 자유란 홀로 선 외로운 나무가 아니라 ‘함께하는 혼자’로 숲을 이루는 푸른 나무인 것을.’ 사진마다 달린 박노해의 이야기는 소담하고 따뜻했다. 더디 가는 내게 그곳이 어디든 홀로가 아니라고, 함께 하는 혼자들이 많다고, 사진이 위로해준다. 시인의 고요한 알림과 깊은 향의 커피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혼자 그리고 함께, 소박한 삶의 가치를 알아가는 인생을 꿈꾼다.
아직 찬 공기가 감싼 계절의 한복판에서 내가 이른 봄날 가진 첫 마음을, 그 설렘을 일깨운다. ‘디레 디레’라 이름 붙인 사진전이다. ‘천천히 천천히’보다 더 나긋나긋한 느낌의 이 단어가 마음에 쏙 든다. ‘부암동’과 더없이 어울렸다. 갤러리를 나서 디레 디레 부암동 언덕을 내려간다. 바람과 햇살이 머무는 산자락을 돌아본다. 새해를 단단하고 깊이있게 마주하는 개나리의 싹이 햇살에 비쳐 보일 듯 말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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