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쪽팔리게 살지 맙시다.”
영화 ‘베테랑’의 대사를 패러디한 이 냉소적인 한마디는 지난달 8일 KBS 보도본부 ‘보도정보시스템’ 게시판에 익명으로 게시된 댓글 가운데 일부다. 댓글이 달린 원문은 탐사보도팀 이병도 기자가 ‘훈장 2부작’ 방영을 촉구하는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란 제목의 글로, 불방 과정의 공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글의 말미에서는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 이번 취재 과정에서 보인 국장과 부장의 태도는 안절부절과 도망다니기였습니다”라고 적시하며, 불방의 책임이 전적으로 보도 책임자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다. 앞서 소개한 댓글 속 ‘선배’는 바로 그 보도 책임자인 ‘국장과 부장’을 가리킨 셈이다. 그리고 ‘국장과 부장’의 ‘두려움’을 둘러싼 공방은 아직도 종결되지 못한 채 KBS 보도본부 내부에 축적된 불신의 정서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KBS 탐사보도팀이 2013년부터 기획 취재한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훈장 수여 내역을 집중 조명한 아이템이다. 당초 ‘시사기획 창’을 통해 6월과 7월에 한 편씩 방송하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5월 말 메르스 사태로 방송이 한 달 가량 밀렸고, 담당 취재진도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하지만 7월로 접어들자 훈장 아이템이 방송 목록에서 돌연 사라지면서 불방을 둘러싼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됐다. 취재진은 ‘이승만 망명 요청 보도’ 이후 보도 책임자들의 눈치 보기가 시작됐다고 주장했고, 9월에는 KBS 기자협회를 비롯한 4대 협회가 방영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급기야 같은 달 KBS 양대 노조도 공동 성명을 통해 사측이 전례 없는 시간 끌기로 방영을 미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탐사제작부장은 취재진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글을 게시했다. 취재진이 데스크의 정당한 수정 요구를 무시한 채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아이템 불방은 지극히 정상적인 절차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훈장 아이템’의 기획과 취재를 승인했던 전임 탐사보도팀장이 ‘훈장 2부작은 편협하지 않습니다’란 글을 통해 현장에서 목격하고 체험했던 갈등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공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기획안과 실제 원고가 달랐고, 팩트에 대한 해석도 편파적이었다는 보도 책임자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전임 팀장의 판단이었다. 심지어 원고 내용의 편파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법률자문도, 탐사제작부장이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같은 날 탐사제작부장은 또다시 반박글을 게시했지만 앞서 전임 팀장이 지적한 쟁점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쯤 되면 담당 국장과 부장을 포함한 보도 책임자들의 확고한 ‘불방 의지’를 그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2개월이 넘는 ‘성명 공방’을 거치고서도 불방의 원인이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방영 여부에 관한 결정권을 가진 간부들조차 불방의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과 다름없다. 그것은 또한 ‘이승만 망명 요청 보도’ 이후 변화된 사내 분위기와 직결된다는 취재진의 의혹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탐사제작부장은 성명에 ‘데스크의 정당한 업무수행을 눈치 보기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는 분노를 느낀다’고 적시했지만, 취재진이 해명을 요구한 논점에 대해서는 단 한 건의 명쾌한 답변도 내놓지 못했다. 또한 작금의 상황은 새 사장 선임을 앞두고 향후 빈번하게 발생할 갈등의 전초전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쪽팔리게 살지 말라’는 기자들의 냉소와 불신을 방치하는 한 KBS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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