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과 쿠르디 그리고 국제여론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국제부 차장

▲김동진 세계일보 국제부 차장

국제부에서 일하다 보면 보도사진의 위력을 실감할 때가 적지 않다.
전쟁과 기아, 시위, 환경오염, 자연재난 등에 대해 장문의 기사나 보도영상을 쏟아내도 꿈쩍도 하지않던 여론이 스틸사진 한 장에 성난 파도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쿵저러쿵 장황하게 떠드는 것보다 사진 한 장이 사건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시리아 난민 꼬마 에이란 쿠르디를 통해 다시 한 번 사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가족과 함께 소형 고무보트를 타고 유럽행 피난길에 올랐던 세 살배기 쿠르디는 터키 휴양지 보드룸의 해변에서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됐다. 빨간색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쿠르디가 파도와 모래가 만나는 경계 지점에 얼굴을 파묻고 쓰려져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세계적인 공분을 일으켰다.


쿠르디 사건 이전에도 이미 난민 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 올해 들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 땅을 밟은 일명 ‘지중해 난민’이 8월말 현재 30만명을 돌파했다. 2500명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유럽 어느 나라도 선뜻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쿠르디의 죽음을 계기로 독일과 프랑스 등이 적극적으로 난민 수용에 나서고 있다. 동유럽 일부 국가가 난민 수용에 난색을 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럽연합(EU)이 회원국 전체 차원의 난민 수용 확대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난민 밀입국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꽉 막혔던 난민 문제에 그나마 숨통이 뚫린 셈이다.


동물의 사진도 때로는 국제적인 이슈가 된다. 7월 말 짐바브웨의 국민사자 세실이 무참히 도륙당했다. 동물을 사냥해 박제로 만드는 과시형 사냥인 ‘트로피 헌팅’을 즐기는 미국인 치과의사 월터 팔머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팔머가 축 늘어진 숫사자 앞에서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는 페이스북 사진이 보도되면서 국제사회가 분노로 들끓었다.


세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킹’의 실제 모델로 알려질 만큼 멋진 갈기를 가졌다. 짐바브웨의 명물이자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연구 대상이었다. 세계 각국 언론매체가 세실의 죽음을 주요 뉴스로 다뤘다. 세계 곳곳에서 웬만한 헐리우드 스타의 죽음보다 더 많은 애도가 쏟아졌다.


사진의 힘은 이처럼 대단하지만 때로는 한계도 분명하다. 사진으로 촉발된 국제적 공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냄비처럼 수그러들고 사진을 통해 드러난 구조적 모순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세실 사건만 해도 그렇다. 세실의 죽음으로 ‘트로피 헌팅’이 도마에 올랐지만 정작 대책이 시급한 것은 밀렵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밀렵은 거대 산업으로 성장한 지 오래다. 사자와 표범, 코끼리, 코뿔소 등은 밀렵꾼에 쫓겨 멸종위기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세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밀렵을 뿌리 뽑기 위한 국제적인 움직임은 여전히 미약하기만 하다.


쿠르디 문제는 더 심각한 지경이다. 이 순간도 수많은 난민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고 있다. 시리아 내전이 해결되지 않는 한 안타깝게도 제2, 제3의 쿠르디는 계속 나올 것이다. 시리아 내전은 미국과 영국 등 서방세력과 러시아가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측을 도우면서 지금처럼 악화됐다. 아랍 부유국들도 시리아의 무슬림 형제들을 외면하며 난민 사태 악화를 방조해 왔다. 시리아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선 내전 종식을 위한 국제적 공조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국제 사회가 쿠르디의 죽음 앞에, 세실의 죽음 앞에 함께 공분했다면 이제 한 발 더 나아가 비극의 재생산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세계 각국과 언론, 그리고 지구촌 시민들이 이를 위해 지금이라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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