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로 임기가 끝나는 KBS와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의 이사 선임이 갑자기 연기됐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달 31일로 예정됐던 차기 이사회 구성을 위한 전체 회의를 연기한 것이다. 방통위 내 여당 추천 상임위원과 야당 추천 상임위원의 입장차가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야당 추천 위원들이 이사진 선임에 대한 기준 마련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당 추천 위원들이 이를 거부해 의견이 모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9명을 뽑는 이번 방문진 이사 공모에 60명, 11명을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KBS 이사 공모에는 무려 96명이 지원했다. 평균 7.8대1의 치열한 경합이다. KBS와 MBC의 사장 선임권을 갖고 있는 막강한 권력의 공영방송 이사를 뽑는데 최소한의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동안 뚜렷한 인선규정 없이 KBS 이사회의 경우 여야 7대4, 방문진 이사의 경우 여야 6대3으로 정치권의 나눠먹기가 계속돼 왔다. 정치권의 낙점으로 방송사 이사가 되다 보니 방송에 대한 전문성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애정조차 없는 이사들도 적지 않았다. 식민사관에 물든 학자와 반인륜사이트의 글 따위를 퍼 나르는 이사, 비리 횡령 의혹을 받는 이사 등 시청자가 도저히 방송사 이사로 인정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인물들이 주로 여당 추천 몫으로 내려오곤 했다. 이들은 청와대의 낙점을 받은 인물을 사장으로 선출하고, 그 사장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방송사를 지켜줘야 할 이사회가 정치권력의 압력 제기 통로가 됐다. 인사에 개입하고 보도를 통제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MBC 대주주인 방문진 이사들은 업무와 무관한 외유성 해외 출장을 과도하게 다녀 물의를 빚기도 했다. 김문환 방문진 이사장은 지난 2년간 12회나 해외 출장을 다녔다고 한다. 방문진 이사장과 임원의 해외출장비가 6억5000만원에 달해 MBC 자본금(10억원)의 절반이 넘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적지 않은 회의 참석비와 외유성 출장, 방송사 이사라는 사회적 배경 등은 이사를 맡으면 놓으려 하지 않게 만든다. 3회 연속 이사직을 지원한 이사, KBS와 방문진을 교차지원한 이사도 있다고 한다. 정치권에서 이사를 추천하니 권력에 충성만 하면 가능한 일이다.
어느 회사든 이사회는 최고의 의사 결정 기구이자 책임 기구이다. 하지만 KBS 이사회와 방문진 이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이사로서 개개인의 권리만 누릴 뿐 방송사 경영의 책임은 일절 지지 않았다. 보도의 공정성 문제와 부당해고, 부당인사로 공영방송이 몸살을 앓아도 이사회는 손을 놓고 있었다. MBC 경영진은 대법원에서 해고 무효 판결을 받은 이상호 기자에 대해 법원 판결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정직 6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이를 제지하는 방문진 이사는 없었다. 방송사 지휘 감독권이 있는 이사회라면 최소한 법은 지키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여당과 야당에서 추천받은 이사후보를 여당과 야당에서 추천받은 방통위 상임위원이 심사해 결정하는 건 이상한 관행이다. 사실상 행정기구인 방통위가 방송사 이사를 추천 선임하는 것은 방송의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게 할 수 있다. 관련법의 개정이 필요해 보인다. 방통위는 기왕 이사 선임을 연기했으니 전문적이고 공정한 평가위원회를 별도로 꾸려 이사 후보를 선정하기 바란다. 일정 기간 이상의 언론 방송 종사자나 관련 학과 교수, 관련 단체 활동자 등 전문성을 확보할 자격 요건이 필요하다. 기자협회, PD협회 등 언론 방송계 전문가 단체가 참가해 이사 후보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진정으로 방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후보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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