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사건 증거 조작에 대한 검찰 수사는 윗선 책임을 밝히지 못한 채 끝났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증거를 조작해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몰아간 국정원에 대해서는 불신을 지울 수 없게 됐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또 다른 문제는 언론에 대해서도 국정원이 스스럼 없이 ‘공작’을 자행한 사실이다. 국가기관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 언론의 주된 사명이라는 점에서 국정원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언론을 이용한 사실은 결코 묵과할 수 없다. 국정원에 이용당한 언론에 대해서도 충격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간첩사건과 관련한 국정원의 대 언론 활동은 단순한 언론플레이 정도가 아니다. 지난해 12월 간첩혐의로 기소된 유우성씨에 대한 재판에 출석해 비공개 증언을 했던 한 탈북자는 증언 후 북한의 딸로부터 “아버지의 증언 때문에 보위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연락을 받고 “증언 유출로 가족의 신변이 위험해졌다”는 탄원서를 1월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런 사실이 4월 초 문화일보 등 몇몇 일간지에 보도되기 훨씬 전부터 국정원은 수차례 언론과 접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2월 국정원이 탈북자에게 언론 인터뷰를 종용해 이 탈북자가 동아일보 기자를 만났으나 “내가 살자고 새끼들을 죽일 수는 없다”고 보도하지 말 것을 부탁해 보도되지 않았고, 그러자 국정원은 다른 언론을 다시 접촉했다. 이 탈북자가 문화일보 등의 보도 후 국정원이 언론에 탄원서를 제공한 것으로 의심하며 유출자를 처벌해 달라고 검찰에 고소했을 때는 국정원 이모 대공수사처장이 찾아와 “증언 유출을 문제삼지 말라”고 회유하기까지 했다. 이 대공수사처장은 증거 조작이 이뤄진 유우성씨 사건의 수사 책임자이기도 하다.
탈북자의 비공개 증언이 북한으로 유출된 책임을 유우성씨와 그 변호인단에게 지워 비난이 쏠리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국정원이 탄원서를 언론에 제공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그저 언론플레이가 아니라 또 하나의 ‘공작’이다. 간첩 증거 조작 의혹에 대해 수사를 받고 있던 국정원이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희석시키려고 탈북자 가족의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저지른 부도덕한 공작이자 본연의 임무와는 무관한 집단이기주의적 행위인 셈이다.
국정원의 공작에 놀아난 언론 역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성해야 한다. 이미 증언사실이 유출돼 북한 내에서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탈북자 가족의 사연을 구체적 신변을 모두 노출시켜 가며 보도함으로써 사지로 내몬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이는 특종이나 다른 공공적 목적을 위해 언론이 감수할 수 있는 사소한 오류가 아니다. 보도를 통해 누군가 생명을 걸어야 하는 피해를 입혔다면 그런 기사는 어떤 가치도 인정받을 수 없다. 독자와 사회공익을 위해 봉사해야 할 언론이 국정원의 이해에 복무한 것이다.
탄원서 제출 사실이 보도된 직후 북한 내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는 이 탈북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원해서 (재판) 증언을 나갔는데 국가가 못 지켜줬다. 간첩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안 되는 건 안 된다. 사람 생명이 중요한 거다.”
간첩을 색출해서 국가 안보를 지키는 것은 정보기관의 사명이고, 경쟁적인 취재와 보도로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것은 언론의 임무이다. 하지만 위 탈북자의 말처럼 국민은 안중에 없는 국가기관, 사람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는 언론은 그 어떤 명분도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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