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명해야 할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김동진 세계일보 기자·외교안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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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진 세계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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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만주 하얼빈역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하는 등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군대를 사열하던 중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쓰러졌다.
이 사건을 놓고 105년이 흐른 지금 한·중 양국과 일본이 심각한 인식차를 드러내고 있다. 한·중 양국은 중국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개관하며 그를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테러리스트’라고 맞서고 있다.
그런데 세 나라는 ‘항일영웅이냐 테러리스트냐’라는 논란에 매몰돼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이 격렬하게 충돌한 사건이다.
안 의사가 저격한 것은 이토라는 일제의 노(老) 정치인이 아니라 그로 대표되는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안 의사의 용감한 총격 행위나 왼손 손가락을 잘라 쓴 혈서만을 기억할 뿐 그를 움직인 사상에는 무지하다.
그는 중국 뤼순 감옥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수감생활을 하며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원래 계획은 전체 5장으로 구성하려 했으나 사형 집행이 당겨지면서 1, 2장만 남겼다. 안 의사는 이 책에서 19세기말 20세초 시기를 서양 주도의 ‘약육강식’ 침략주의가 동양평화를 위태롭게하고 있는 시대라고 파악했다. 서양의 침략 위협에 맞서 동양 3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러일 전쟁은 그런 동양 3국 연대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일본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당시 조선과 청국 국민은 일본의 이런 명분을 믿고 일본군에게 운수·도로·철도건설·정탐 등의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반도와 만주가 전쟁의 무대였기에 조선과 청국 국민의 이런 협력은 일본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안 의사는 믿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자 당초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조선의 국권을 찬탈했다. 뒤늦게 속은 것을 깨달은 조선인들은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안 의사가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이토를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그는 법정 심문과정에서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하는 길은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버리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독립한 한국·청국·일본의 동양 3국이 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해야 하며, 동양 3국이 서로 화합해 개화 진보하면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동양 3국의 구체적 협력 방법으로 내세운 제안은 지금봐도 놀랍다. 그는 한·중·일 3국이 ‘상설 평화회의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으로 치면 유럽연합(EU) 같은 다자간 협의기구를 구성하자는 아이디어다. 그는 또 뤼순항의 개방과 공동관리, 3국 공동은행의 설립과 공용 화폐 발행, 3국 군단의 편성과 2개 국어 교육을 통한 평화군 양성, 공동 경제발전 등을 주창했다. 개별 민족국가 단위를 뛰어넘은 이런 지역 통합론은 유럽통합에 관한 사상들보다 30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이런 사상은 100년 이상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안 의사의 사상을 무시하고 그를 일개 테러리스트로 평가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일본은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쓴맛을 보고서도 아직도 옛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중 양국에서도 일본의 과거사 역주행이 계속되자 그에 대한 맞대응으로 안 의사의 기념관을 세우기는 했지만 안 의사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작업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안 의사의 하얼빈 총격만을 문제시하는 것은 달(동양평화)을 가리켰는데 손가락(총구)만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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