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주먹보다 느리다

[스페셜리스트 | 법조]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사회부 법조팀


   
 
  ▲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  
 
2011년 7월 27일 오전 7시3분. 은마아파트 청소노동자 김정자씨(당시 64세)가 전날 폭우로 아파트 지하실에 가득찬 빗물을 퍼내려 들어갔다가 숨졌다. 사인은 감전사였다. 당시 작업을 지시했던 관리소장과 계장은 “작업을 지시한 적이 없다. 본인 과실”이라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필자는 법조기자로 3년을 보낸 뒤 사건팀 기자 생활이 햇수로 2년째에 접어들던 해에 이 사건을 접했다. 김씨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고인의 딸은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용역업체를 비롯한 관계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며 필자에게 소송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과정은 험난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은 “적용할 법조가 마땅치 않다”며 해당 사건을 다른 부서로 미루는 등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기소까지 이뤄졌다.
유족들로부터 검찰이 기소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을 끝으로 이 사건은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그러던 지난 2월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 이성호 판사(현 춘천지법 강릉지원 부장판사)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관리소장과 계장에게 각각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금고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정자씨가 숨진지 햇수로 3년만에 1심 판결이 난 것이다. 사망 당시 고인의 남편은 간암 말기였고, 딸 역시 정기적으로 병원치료를 받는 환자였다. 하루가 아까운 남편과 딸이 부인이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의 유죄판결을 보는데까지 561일의 시간이 흘렀다. 민사상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또 별개의 문제다.

채동욱 검찰총장이 지난달 30일 퇴임식을 가지면서 조선일보를 상대로 한 정정보도 청구소송 소취하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채 총장은 “유전자검사 없이는 1심에서 승소해도 2·3심으로 이어지는 장기간 법정공방이 불가피하다”며 “그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가족에게 다시 고통을 감내하게 할 수 없다”고 소취하 사유를 밝혔다. 다만 유전자검사 결과가 나오는대로 대응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누구보다 언론의 속성을 잘 아는 채 총장으로서는 변론준비기일부터 1심 선고까지 각 언론의 논조에 따라 예측불가능한 내용이 보도되는 것보다 유전자검사라는 명백한 물증을 갖고 재판에 임하겠다는 계산으로 보인다.

또 스스로 언급한 바와 같이 한 사건이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기까지는 수년의 세월이 소요된다는 점도 소취하 사유의 또다른 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설령 채 총장이 대법원까지 가서 전부 승소를 한다고 한들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뒤에야 받아들게 될 판결문 한 장은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사건의 경우 1심에서부터 대법원 상고심까지 최종 결론이 나는데는 평균 2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자료가 방대하고, 쟁점이 복잡할수록 기간은 늘어난다. 하급심 선고 후 상급심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사건을 맡았던 재판부가 상급법원에 넘길 재판기록 등 자료정리를 하는 데만 한 달 이상이 소요되기도 한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급성폐질환으로 숨진 유아들의 부모가 옥시레킷벤키저 등 제조·판매사 3곳과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지난해 1월 17일 소장이 접수된 이후 현재까지 변론준비기일만 11차례 진행하고 있다.

수천억원대의 횡령·배임혐의로 기소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기소에서부터 최근 대법원 파기환송까지 걸린 기간은 971일. 수백억원대의 횡령·배임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기소단계에서부터 항소심 선고까지 걸린 기간은 632일이다. 최 회장은 대법원 선고까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김 회장 역시 파기환송심을 거쳐 대법원에 재상고할 경우 또다시 4~6개월의 기간이 소요된다.

일각에서는 채 총장이 뭔가 찜찜한 부분이 있어서 소취하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미천한 법조경력을 가진 기자도 아는 사실을 수십년간 검찰에 몸담아온 그가 모를 리가 없다. 법정다툼이라는 것이 얼마나 긴 세월동안 큰 고통이 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준엄한 법집행은 세상을 바꿀 수 있지만 슬프게도 주먹보다는 느리다.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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