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그리고 소녀상(像)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기자·외교안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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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진 세계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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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최근 ‘소녀의 상(像)’이 화제다.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시 시립도서관 앞 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지면서다. 이 동상은 현지 한인 동포단체가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2년 이상 지속적으로 글린데일시 정부를 설득하고 자체적으로 3만 달러를 모금해 건립됐다.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이 동상의 건립에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주재 일본 총영사는 부에나파크 시의원 5명에게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충분한 사과와 보상을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일본도 미국에 ‘소녀의 상’ 건립을 추진해왔다는 사실이다. 미 워싱턴주의 시애틀 평화공원에 가면 일명 ‘원폭 소녀의 상’으로 불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소녀상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지 10년 만에 백혈병으로 숨진 사사키 사다코(당시 12세)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히로시마 중심부에서 1.6km 떨어진 곳에 살던 사다코는 2살때 피폭을 당한 후 12살때인 1954년 뒷부분과 목이 부풀어 오르고 다리에 붉은 반점이 생기는 등 피폭 후유증을 앓기 시작했다. 사다코는 급우로부터 종이학 천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얘기를 듣고 그때부터 병상에서 종이학을 접기 시작해 644개의 종이학을 만든 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친구들은 나머지 356개를 더 접어 종이학 1000개를 완성, 그녀의 무덤에 넣어줬다.
이 사연이 알려지면서 사다코는 1958년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동상이 세워지는 등 일본 원폭피해자의 대변자로, 반전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녀의 사연을 담은 소설 ‘사다코와 천마리 종이학’은 영문판까지 만들어져 영미권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그 결과 미국의 일부 평화운동단체와 일본계 미국인들은 1998년 시애틀 평화공원에 그녀의 동상을 처음으로 세웠다. 1998년에는 사다코의 슬픈 사연에 감동을 받은 미국 내 어린이 8만여명이 모금을 통해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세계 최초로 핵폭탄을 개발한 곳)에 사다코의 동상을 세우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원폭소녀의 상 건립 운동은 결과적으로 크게 확산되지 못했다. 일본이 교묘하게 태평양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왜곡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 초등학생들의 모금을 통해 만들어진 사다코의 동상은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측의 거부로 18년째 설치 장소가 정해지지 못해 뉴멕시코의 한 박물관에 임시 보관돼 있다. 시애틀 평화공원의 사다코 동상도 그동안 2번이나 팔이 잘려나가는 수난을 겪었다.
일본은 미국이 사다코 동상을 통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입은 피해와 고통을 평가해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오히려 많은 미국인들이 위안부 소녀상을 통해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야만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일본이 위안부 강제동원이라는 역사적 과오는 철저하게 부인하면서 사다코를 내세워 자신들을 피해자로만 ‘이미지 메이킹’하고 있는 사이에 연로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차례차례 눈을 감고 있다. 11일에도 이용녀 할머니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듣지 못하고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위안부 피해자 234명 중 생존자는 57명으로 줄었다.
16살 때인 1942년 미얀마 양곤으로 끌려가 성노예로 갖은 고초를 겪었던 이 할머니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정신적 고통에 척추관 협착증까지 겹쳐 말년까지 힘들게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세계가 태평양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알려면 어린 나이에 피폭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사다코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위안부 소녀상에 담긴 역사적 진실을 똑똑히 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위안부 소녀도 원폭 소녀도 모두 일제의 전쟁 광기에서 비롯된 역사적 희생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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