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장재구 회장이 결국 손에 피까지 묻혔다. 21일 기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쪽짜리 인사위원회를 열어 이영성 전 편집국장을 해임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그는 한국일보를 새 정부 출범 뒤 언론계 첫 해직사태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는 한 신문사 고위 간부 개인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한국일보 기자 전체에게 도전장을 내민 행위다.
장재구 회장은 이미 오래 전에 회사를 떠났어야 했다. 그가 오랜 내부 권력투쟁 끝에 경영권을 쥐는 데 성공한 뒤에도 한국일보의 회생은 요원했다. 한국일보 구성원들은 수년째 계속되는 적자 행진에 취재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며 악전고투해왔다. 이런저런 노력이 물거품이 된 채 회사 매각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그는 결국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배임 의혹으로 고발까지 당한 상태다. 참다못한 한국일보 기자들의 “장재구 회장 10년은 악몽이었다”는 절규는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만약 기자들과 자신의 가족들이 일궈놓은 한국일보의 신화에 책임감을 느낀다면 장 회장이 택해야 할 적절한 처신이 무엇인지 당연히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그는 편집국장을 2년 사이 두 번이나 경질하면서도 스스로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지난해 한국일보의 비판적 지면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던 이충재 전 편집국장을 마케팅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교체했다. 아무리 신문업계가 불황이고 한국일보가 위기라 해도 참담함을 감출 수 없는 조치였다. 편집국 기자들의 총책임자인 편집국장 업무능력에 대한 기준이 지면이 아니라 광고 수주 능력이 우선이라면 그 경영자의 무능부터 따지고 스스로 떠안아야 할 문제였다.
무엇보다 회사 경영 정상화가 급선무였던 한국일보 구성원들은 편집국장 임면 절차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노사협약안 개선을 조건으로 새로운 국장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편집국장을 경질하고 이제는 해고까지 시켰다. 회장을 비판하는 기자들의 성명을 신문 1면에 실은 것도 문제가 된 모양이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그동안 온갖 설움 속에서도 억눌러야 했던 자존심을 자신들의 생명과 같은 신문의 얼굴, 1면에 분출했다. 그것이 순간의 충동에서 나올만한 성질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언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일말의 양심이 있는 최고경영인이라면 이에 대해 해고와 위협으로 화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론사는 기업이지만 동시에 기업일 수만은 없다. ‘기자사관학교’로 불리며 한국 언론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한국일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사주라고 해도 언론사를 단순한 사적 소유물로 생각한다면 더 이상 언론사일 수가 없다. 하물며 일반 기업의 사주들도 경영을 못하면 책임을 지는 게 시대의 흐름이다. 곪을 대로 곪은 한국일보 사태의 원인을 외부로 미뤄서는 더 이상 곤란하다.
장 회장은 거듭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고 겸허한 자세로 기자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기를 바란다. 그것이 언론사 대표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품격을 유지하는 일이며 한국일보의 명성을 쌓아온 사람들의 피땀에 누를 끼치지 않는 길이다. 한국일보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 마지막 희망은 저널리스트로서 자존심과 회사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선 한국일보 기자들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언론사주는 반드시 실패한다.
편집위원회의 전체기사 보기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