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는 수밖에"라던 그 말

[스페셜리스트│IT] 김상훈 동아일보 기자·산업부


   
 
  ▲ 김상훈 동아일보 기자  
 
3년 반 전이었다. 이른바 ‘7·7 디도스 사태’가 한창이던 시기에 편집국으로 복귀해 다시 정보기술(IT) 분야를 취재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복귀 후 첫 기사는 정보보안업체 안랩의 김홍선 대표 기자회견.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이런 일 여러 번 겪어 봤다.” 잊을만하면 터지던 정보보안 사고 얘기였다.

이후 그 말이 예고였던 것처럼 2011년 4월 농협 전산망 마비 사태가 있었고, 6월에는 SK커뮤니케이션즈의 회원 3500만명의 개인정보가 해킹으로 유출됐으며, 11월 게임업체 넥슨의 1300만명 개인정보 유출 사고까지 터졌다.

당시엔 근본적 해결책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10여 년 전 만든 공인인증서 체계를 손보라는 건 기본이었다. 정부가 민간 기업의 보안을 ‘인증’해주고 기업은 정부의 인증 요건만 맞추면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소비자 보호는 모른 체하는 제도 자체가 문제가 됐다. 이런 요구 탓에 방송통신위원회는 업체들이 정부 규정 때문에 억지로 써왔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액티브엑스’라는 구식 기술을 자제시키는 가이드라인까지 만들어야 했다.

어디 정보보안뿐일까. 3년 전 아이폰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 소비자는 외국에선 흔한 무료 무선통신 기능인 와이파이도 쓸 수 없었다. 통신사가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같은 휴대전화 제조사를 윽박질러 국내에서 팔리는 휴대전화에선 와이파이 기능은 빼라는 주문을 했기 때문이다. 동영상도 통신사가 보라는 것만 봤고, 게임도 통신사가 하라는 것만 했다. 하지만 아이폰에선 와이파이는 물론이고 통신사 눈치를 보지 않고 만든 기능이 잔뜩 들어 있었다. 게임, 앱, 전자책 등 다양한 콘텐츠도 어디서나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도 사라지는 것 같았고, 통신사가 좌지우지하는 ‘우물안 개구리 무선인터넷’에도 빗장이 열린 것 같았다.

2012년의 마지막을 돌아보자. 엉망인 시기를 우린 슬기롭게 극복했다.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는 안 된다며 대안을 주장했던 건 규제 없는 인터넷과 최신 기술을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기를 원하는 전문가 집단이었다. 시작은 뒤졌지만 놀라운 속도로 세계 수준의 무선인터넷 시대를 열어낸 건 수많은 소규모의 앱 개발자와 콘텐츠 제작자들이었다.

그런데 위기를 극복한 뒤 과실은 엉뚱한 곳으로 갔다. 다양한 보안기술을 꽃피워야한다며 의무사용 규제를 없앨 것을 요청했던 공인인증서는 여전히 살아 남았다. 규제 당국이 공인인증서 이외의 대안이 없다면서 버텼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 식 통신강국도 여전하다. 통신사들은 ‘아무것도 통제하지 않는다’는 구글의 개방형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거꾸로 이용해 그 속에서 자신들만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예전엔 돈을 더 내야 통신사가 고른 콘텐츠를 즐길 수 있었다면 이젠 돈을 일단 많이 낸 뒤 통신사가 고른 콘텐츠를 볼 때만 요금을 절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통신사가 고른 동영상은 데이터통화료가 무료, 통신사가 고른 전자책도 데이터통화료가 무료. 하지만 이 돈은 결국 소비자가 낸 돈이다.

3년 반 전 기자회견 때 안랩 김 대표는 “앞으로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면서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라고 말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부의 관료주의와 소비자를 뒷전으로 여기는 기업의 이윤추구가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그래도, 새해에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김상훈 동아일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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