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언론 재갈물리기’가 또다시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김종훈 새누리당 국회의원 당선자(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지난해 11월 한겨레신문과 기자 3명을 상대로 제기한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재판부는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사안을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호하지 못하면 국민의 알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할 수 있다”고 주문 이유를 밝혔다.
외교통상부와 김 당선자로서는 당혹스러운 판결일지 모르지만 이번 패소 판결은 공직자와 관련된 명예훼손 법리에 대해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견 가능한 사안이다.
1964년 미 연방 대법원의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 이후 ‘공적 사안에 대한 보도의 경우 악의적 의도가 없는 한 언론자유가 우선한다’는 법리는 전 세계적으로 공직자의 명예훼손과 관련된 사안에서 불가침의 명제로 자리잡았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는 외교통상부에서 수십년간 잔뼈가 굵은 김 당선자가 설리번 판결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대법원도 지난해 9월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MBC PD수첩 ‘광우병 보도’ 제작진 5명에 대해 같은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김 당선자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안 국회 비준을 앞두고 ‘쌀시장 추가협상 약속’보도와 관련, 민·형사 소송을 밀어붙인 이유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정부의 바람대로 한·미 FTA는 숱한 반대 목소리를 뒤로한 채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됐으며 김 본부장은 FTA 전도사로서 ‘명성’을 바탕으로 서울 강남에 출마, 지난 4월 총선에서 금배지를 거머쥐었다. 그 사이에 김 당선자에게 거액의 명예훼손과 형사고소를 당한 기자들은 숱하게 검찰청과 법원을 드나들며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김 당선자가 오기를 부려 항소심과 대법원까지 재판을 끌고 갈지 모르겠지만 그들로서는 이미 언론의 ‘위축효과’라는 충분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적어도 이명박 정권 하에서 기자들은 정권의 ‘불편한 진실’을 보도하기에 앞서 ‘PD수첩과 한겨레 기자가 거쳐야 했던 심적인 고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이번 판결을 대하는 기자들의 심정은 그래서 비감할 수밖에 없다.
설리번 판결이 나오기 전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누군가에 대한 비정의(Injustice)는 모두의 정의(Justice)에 대한 위협”이라는 말로 침묵하는 미국 사회의 지성을 고발한 바 있다.
100일이 넘는 방송3사의 파업사태와 언론사찰 문건 파문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정권과 무심한 여론을 보며 온갖 수난을 견뎌야 하는 기자들에게 킹의 웅변은 먼 나라의 얘기로만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도 희망은 남아 있다.
미국에서 설리번 판결은 공직자의 명예훼손과 공적보도에 대한 명확한 법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언론 전체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어 결국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에 대한 날카로운 보도를 이끌어냈다. 이번 한국판 설리번 판결을 계기로 기자들을 위축시키려는 정권의 남소((濫訴)가 거꾸로 이명박 정권의 ‘워터게이트’보도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편집위원회의 전체기사 보기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