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기지에서 근무했던 한 군무원의 증언으로 한반도에서의 고엽제 문제가 또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1978년 경북 칠곡의 캠프 캐럴에서 근무했던 스티브 하우스씨는 피닉스의 한 지역방송국과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근무할 당시 ‘상부의 명령’으로 기지 뒷산에 노란색 드럼통 2백50개를 묻었다고 폭로했다.
사건이 표면에 떠오르자 주한미군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명을 발표하고 현장을 공개했다. 한·미 양국이 이 문제의 해결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했고, 이번주 부터는 모든 주한미군 기지에 대해 레이더를 이용한 토양조사를 실시한다는 발표도 했다. 지난 2002년처럼 한국의 정치일정이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어 이번 사건이 정치적 소재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이번 사태를 더욱 면밀히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속한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실하고 투명한 자세로 진상을 밝히고, 문제가 드러날 경우 합당한 조치가 이뤄져야만 한다. 그런데 조사 시작부터 진정성이 의심되는 부분들이 나타나고 있다. 미군이 발표한 첫 번째 입장부터 믿기가 어렵다. 1978년 캠프 캐럴 기지에 화학물질을 매립했고 1980년에 그 오염물질과 토양을 모두 파내 반출했지만 반출 목록에는 고엽제가 없고, 반출된 물질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다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정부의 대응 역시 미온적이다. 주한미군의 주둔 자체가 한·미 양국의 공동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환경 문제는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라 우리의 명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미국 측과의 공동 협의에만 의존할 뿐 적극적인 조사 의지는 빈약해 보인다. 그동안 고엽제를 뿌렸다는 각종 증언은 언론의 취재와 보도에서 밝혀진 것일 뿐 정부 관계자가 나서서 증인을 찾거나 수소문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 문제가 세상의 관심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주한미군 측이 ‘투명한 공개’라는 원칙만 내세우며 알맹이 없는 발표만 하는 사이 다른 대형 이슈들이 미디어를 점령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계속 원칙만 반복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서 고엽제는 또다시 사라질지 모른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고엽제 불법 매립 문제는 한·미간의 새로운 불씨가 될 소지가 있다. 당장 정답이 밝혀지는 게 아니라 양국 정부의 자세에서 나타나는 ‘신뢰의 문제’에 따라 사태의 추이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발전을 위해 양국 대통령 차원에서 정치적인 의지를 확고히 보여야 한다.
차제에 한·미 주둔군 협정(SOFA)의 개정도 필요하다. 그동안 변화된 여건을 고려해 주한미군 기지를 친환경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새 공동지침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언론의 역할이 주목되는 것은 우리 정부로서도 협상 상대방인 미국에 할 말이 필요하고, 그것을 언론이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관심사는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한·미 양국 정부가 나의 주장을 확인하고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스티브 하우스씨가 던진 이 말에 이제는 우리가 대답을 준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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