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18년 동안이나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북풍’ 덕분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특수부대원 31명이 서울 세검정 고개를 넘어 청와대 코앞까지 습격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틀 뒤에는 미국 정보함인 푸에블로함이 북한에 납치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안보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두 사건은 야당과 학생들의 3선 개헌 저지 투쟁에 찬물을 끼얹는 ‘전가의 보도’였다.
1979년 12·12 쿠데타와 이듬해 5월 광주시민들의 피를 먹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다. 전두환과 민정당은 물고문, 성고문 등 온갖 방법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그들만의 ‘정의사회’를 구현했다. 1983년 가을 소련(현 러시아)의 KAL기 피격사건과 북한의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사건은 전두환 체제를 공고히 하는 밑거름이 됐다. 두 사건은 국민들에게 반공과 안보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면서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마침내 국민들은 1987년 6월의 뜨거운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러나 대선을 불과 18일 앞둔 11월29일 터진 KAL 858기 폭파사건으로 군부는 재집권에 성공했다. 대선 전날 KAL기 폭파범이라는 묘령의 여인을 압송하는 장면은 ‘북풍’의 하이라이트였다.
민간 정부가 들어서고 남북 화해 물결이 조성되면서 ‘북풍’은 되레 역풍이 되곤 했다. 1996년 총선기간에 일어난 판문점 총격사건이 그랬고, 2002년 대선 때 북핵사건이 그랬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북풍’이 불고 있다. 국방부는 공식 선거운동 첫날 천안함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사고 발생 초기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히 조사하겠다”던 다짐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의 진상을 조사하고 백서를 내놓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런데 국방부는 천안함 어뢰 공격의 증거물을 건져올린 지 닷새 만에 서둘러 발표했다. 하지만 의문 투성이다. 북한의 움직임과 관련된 정보 판단과 물기둥의 존재 등이 초기 판단과 완전히 달라졌다. 가스터빈실 등 원인 규명에 핵심적인 증거자료는 빠진 채 시뮬레이션이 이뤄졌다. 조사단을 파견하겠다는 북한의 요구에는 꿈쩍 않고 불응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의 천안함 일정은 선거 때까지 빼곡하다. 24일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이어 26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방한, 29~30일 한·중·일 정상회담 등이 줄을 잇는다. 이번 ‘북풍’은 1970~80년대급 규모다. 실제로 기자협회가 주관해 언론노조, PD연합회와 함께 벌인 기자대상 공동여론조사에서 천안함 사태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응답이 73.5%가 나왔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가 선거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응답이 30%대에 그쳤다.
북풍의 불씨는 정부가 지피고 보수언론은 열심히 부채질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북풍’으로 지방선거에서 이겼다고 좋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꼼수’는 언제나 역사의 웃음거리가 됐다는 사실은 왜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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