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기자들의 자존심 건드려 이뤄낼 일은 없다
[우리의 주장]편집위원회
자존심 없는 사람 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다. 자존심이 없으니 누가 무엇을 시키든 비굴할 것도, 치욕스러울 것도, 예의를 갖출 것도 없다. 그저 노예처럼, 개처럼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만이다. 상대가 자비를 구하거나, 혹은 상식과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안을 제안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관심 밖이다. 자신의 밥그릇에 밥을 채워주는 사람의 뜻만이 지고지선의 절대명제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과 달콤함을 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존심 없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다. 바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설령 조금씩 밀려나고, 조금씩 깨져가고, 조금씩 패배하면서도 자존심만은 지키려는 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기본이다. 설령 모든 것을 잃어도 마지막 자존심만은 잃지 않고자 하는 것이 스스로 주인되도록 자존심을 지키는 인간의 본질이다. 이것을 건드릴 경우 역린(逆鱗)을 건드린 자가 당해야 할 혹독함을 각오해야 한다. 자존심에 상처입은 이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정부의 방송 언론 장악 기도가 슬슬 종막으로 치닫고 있다.
자존심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 권력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방송문화진흥회의 움직임에는 좌고우면이 없다. 그저 묵묵히 방송 장악의 지시를 떠받들고 있을 뿐이다. KBS 정연주 사장을 쫓아냈고, YTN을 장악했고, 기자들을 무더기로 쫓아냈으며, SBS는 순망치한인 듯 제풀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이달 초 마지막 남은 고지, MBC에서 엄기영 사장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설마 수십 년 민주주의 성과를 이렇게 한순간에 부정할 수 있으랴 생각했던 일이었지만 누군가의 하수인으로 살며 자존심 없이 사는 이들에게 이 정도의 극악무도한 행각은 손바닥 뒤집는 일이었다. 군사작전 펼치듯 속전속결로 일을 진행했고, 상당히 성공하는 듯 느껴질 것이다. 남은 것은 낙하산 사장 투하만 남은 듯하다. MBC 기자와 구성원들의 압도적인 총파업 의지나 열흘을 훌쩍 넘긴 MBC 로비 시위,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발은 언제든 콧방귀 뀌며 무시할 수 있을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내용을 간과했다. 바로 국민들과 기자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모멸감을 안기며 최후의 몫으로 남겨뒀던 자존심을 깊숙이 후벼 판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노와 저항의 이글거림은 어떡할지 부디 생각해봐야 한다. 국민들이, 한국의 기자들이 정권에 휘둘리는 관영 방송을 허용할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국민들과 기자들이 언론 장악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쳐다보고 말 것이라고 방심하는 것인가.
MBC 기자들을 포함한 절대 다수의 구성원들은 이미 방문진이 선정한 15명 후보-선배 12명을 포함한-에게 ‘정권의 앞잡이’ 혹은 ‘정권의 들러리’ 역할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총파업을 준비하는 MBC 구성원들과 말없는 분노를 불태우는 국민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대한민국 모든 기자들과, 대한민국에서 자유와 민주를 바라는 모든 국민들을 적으로 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 경고이자 당부를 무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또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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