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업이 입사시험을 치렀다. 그 분야에서 나름의 실력자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회사는 채점 위원을 뽑아 응시자들이 낸 답안지에 성적을 매기도록 했다. 그런데 이 채점 위원은 ‘자격에 맞는 성적을 거둔 후보자가 없다’며 재시험을 보도록 했다. 그리고 그 채점위원 스스로가 응시해 1등을 하고 채용됐다. 무슨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본이 아니다. 실제 지상파 언론사의 사장을 뽑는 과정에 일어난 일이다.
최근 EBS의 신임 사장에 선임된 곽덕훈 씨는 이 회사 사장 1차 공모에서 3명의 외부 심사위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당시 후보자들을 모두 조건에 미달된다며 탈락시켰다. 그리고 2차 공모에서는 직접 후보로 나서더니 사장이 된 것이다.
곽 씨의 자격이나 능력에 대한 논란을 떠나 이런 어이없는 선임 절차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감독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는 “1차 공모 때 면접위원이라고 해서 2차 공모에서 절차상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또 “1차 면접위원이 재공모에 응모할 수 없다는 제한 규정도 두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백 번 양보해 설사 방통위가 곽 씨에게 암묵적인 가산점을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면접위원으로서 면접 내용과 심사 기준을 다 알고 있었던 만큼 출제 문제와 답안을 알려 주고 보는 시험과 다를 바 없다. 법적인 문제를 떠나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방통위는 방송정책국장을 지낸 황부군 씨를 EBS 감사에 임명했다.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를 자행했다는 점만이 문제가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사장 선임 절차와 맞물려 EBS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겠다는 뜻을 이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이번 사장 1차 공모에서 EBS 측은 후보자 면접 과정을 사내 방송을 통해 공개했다. 면접에서 오고 간 질문과 대답이 ‘망언’ 수준이었다는 것이 EBS 노조 측의 증언이다. ‘학교교육 보완, 평생교육, 민주적 교육 발전’이라는 EBS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훼손하고 일개 학원방송화하려는 속내가 드러나는 대목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공모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시도 자체만은 참신했다. 하지만 곽 씨를 사장으로 선임한 2차 공모 때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EBS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더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지상파지만 교육이라는 분야에 특화된 EBS에 대해서도 이렇게 야욕을 드러내는 이 정권이 앞으로 방송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심히 우려된다. 이미 KBS 사장 선임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들은 우리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수준이다.
방송은 정권의 파수꾼일 수 없다.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방송이 일체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은 언론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동의하는 사실이다. 이 정권이 역사를 거스르는 책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즉시 곽덕훈 씨의 EBS 사장 선임을 철회해야 한다. 또 곽 씨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 허무 개그를 그만두고 스스로 물러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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