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법을 직권상정까지 하면서 투표를 했더니 의결정족수가 모자랐다. 그래서 다시 투표를 강행했다. 무조건 통과시켜야 된다는 일념에 상식 앞에서도 눈을 감았다. 그런 식으로 한 재투표는 어떠했나. 동료 의원들의 자리를 몇 개씩 뛰어다니며 대신 투표를 해줬다는 의혹이 무성하다. 법을 만드는 국회에서 저지른 불법이다. 이대로라면 될 때까지 투표한 법이 불법 투표를 통해 국회를 버젓이 통과한 셈이다. 초등학생들도 민주주의를 배우면서 자신이 행사하는 한 표의 의미를 새긴다. 코흘리개 초등학생에게도 국회의 대리투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통과와 동시에 헌법재판소의 권한쟁의심판이 진행 중인 이 논란 투성이의 미디어법을 절차에 따른다며 국무회의를 거쳐 선포했다. 그리고 이 법을 반대하는 집회를 이끌었던 언론노조 위원장은 가족들 앞에서 수갑을 채워 잡아갔다.
국민들에게 이런 법을 법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국민들이 거리에 나서고, 목청껏 외치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란 오만한 판단을 거둬야 한다. 법은 인간사회의 상식을 규정화한 것이다. 상식을 짓밟으면서 법과 원칙을 떠든다는 건 후안무치의 극치에 다름 아니다. 법과 원칙을 이런 식으로 모욕하는 것은 바로 국민을 모욕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처럼 무리수를 두면서도 모든 현안을 제치고 최우선적으로 미디어법을 통과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비판 언론을 장악하고, 정권에 우호적인 재벌, 족벌 방송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다. 그러니 법 자체의 효용과 정당성을 제대로 증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방송 산업을 발전시켜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 근거로 유일하게 들고 있는 정보통신연구원의 급조된 보고서는 수치조차 조작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디어법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정보통신연구원은 2만여 개의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건 방송사가 잘돼 식당이 잘되면 방송국뿐 아니라 식당에서도 고용이 늘어난다는 뜻이라고 농담 같은 주장을 한다.
지난 2000년 이후 방송시장은 2배 성장했지만 일자리는 6백명이 늘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외면하는 건가. 국민들 앞에, 미디어법이 통과돼서 방송산업이 발전하면 방송국과 식당에 일자리가 생긴다는 한가한 말을 내뱉을 자신이 있는가. 그 해괴한 논리를 들이댈 수 있는가. 국민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통과하겠다는 법의 목적과 효과가 이처럼 궁색하니 비판 언론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만 더욱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신문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 언론들에 방송을 넘겨주고, 재벌이 보도를 하게 만들어 여론의 다양성을 확보하겠다니, 국민을 바보로 아는가. 이런 정부와 여당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후회스럽고 서글플 뿐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어떤 무리수를 두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사라지고 강제할 수 있는 법만이 남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심각한 오판이고 두려운 역사 인식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이 역사에 낱낱이 기록되고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민주주의의 파국과 언론자유의 말살을 누가 획책했으며, 어떻게 역사의 퇴행이 이뤄졌는지, 우리 모두가 그대들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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