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지리멸렬해서는 안 된다. 강하게 가자”는 ‘형님’ 이상득 의원의 한마디에, 한나라당 고흥길 문방위원장은 미디어법 ‘기습’ 상정을 기도했다.
야당과 언론노조, 학계, 시민단체의 강력한 저항으로 미디어법 2월국회 강행 처리 기도는 다시 무산됐지만, 한나라당의 기본적인 인식은 정 안되면 힘으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이쯤 되면 한나라당이 이런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미디어법 처리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가 궁금해지기까지 할 정도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이유는 재벌과 신문의 지상파 진출을 허용하는 방송법과 신문법 개정안이 ‘일자리 창출’과 ‘여론의 다양성 확대’에 기여할 거라는 것이다.
‘미디어법이 일자리 2만개를 만든다’며 서울 시내 버스에 광고로 도배를 했던 ‘일자리 창출론’이 최근 반론에 부딪치자 요즘 한나라당은 ‘여론의 다양성 확대’ 쪽에 법안의 의의를 더 두고 있음을 공공연히 하는 분위기다.
그럼 한나라당이 말하는 ‘여론의 다양성 확대’는 무엇을 뜻하는가? 미디어법을 두고 여야의 힘겨루기가 최고조에 이른 지난 1일 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미디어법을 일부 수정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대목에서 그 속내를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박 대표는 “재벌의 지상파 진출을 원천적으로 불허하는 수정안을 제출할 수도 있다. 다만 신문의 지상파 진출 허가는 기존입장에서 변함이 없다”고 밝혔는데, 이는 미디어법의 핵심이 ‘신문의 지상파 진출’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재벌은 양보할 수 있어도 신문은 양보할 수 없다는 말인데, 이 대목에서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통해 구현하려는 ‘여론의 다양성 확대’가 어떤 것인지 분명해진다. 조중동 등 보수 신문의 논조를 아침엔 신문으로, 저녁엔 방송으로 보도록 하자는 것과 다름 없다. 언론의 장악 여부에 현 정권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1백일간 논의될 미디어법의 주요 쟁점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미디어법이 22개라고 하지만 핵심은 ‘방송법 개정안’과 ‘신문법 개정안’ 이 두 가지이며, 특히 신문사의 방송 참여 부분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 미디어법을 둘러싼 논쟁은 찬반 양립 상황이 절대로 아니다. 어떤 여론조사 결과도 현행 미디어법에 대한 찬성 의견이 우세한 경우는 없었다. 대다수는 반대인 것이다. 미디어법이 일자리 창출이나 미디어산업 선진화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국민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지상파의 독과점을 해소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이를 구실로 여론을 독과점하고 있는 조중동에 방송의 진출길을 열어주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필요하며 시급한 일인지 심도 깊게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여야가 합의한 ‘1백일간의 논의 후 표결’ 방침에는, 적어도 이를 통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는 전제가 있음은 다시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만약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표결 시한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또다시 미디어법의 졸속 처리를 밀어붙이려 한다면 한나라당은 지금보다 더욱 큰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날치기 시한을 1백일 뒤로 미뤄놓았을 뿐이라는 시각을 한나라당이 불식시켜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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