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한다고 南美 간 의원들 '마추픽추' 관광은 필수코스
212회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신문부문
“마추픽추는 신비스런 고적지였습니다. 산비탈에 석조물을 쌓고 비를 모아 농사를 짓는 모습이 어쩐지 동양적 신비로움을 간직한 것 같았어요. 개발이 좀 덜 된 것 같아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7대 국회에서 페루 마추픽추로 의원외교를 다녀온 A의원의 말이었다. 남미 체류가 처음이었다는 A의원은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로 이어지는 해외활동에서 큰 문화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하지만 정작 의회 간 교류활동에 관해서는 별로 기억나는게 없는 듯 했다. 자신이 만난 페루의 의회 지도자들의 이름조차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국회의원의 외유성 해외활동은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아 타성으로 자리잡은 문제다. 취재팀은 기존 보도와의 차별화를 위해 예산 낭비와 보고서 부실 실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기로 했다. 국회사무처에 ‘17대 국회의원 해외활동 내역’에 관한 정보공개청구와 관련 회계자료 열람을 신청하며 기나긴 취재는 시작됐다.
150여건의 보고서와 그에 달린 수 천페이지의 회계장부를 분석하는데 꼬박 2주가 걸렸다. 보고서를 샅샅이 뒤져 다른 보고서를 베끼고 또 베끼는 행태를 발견했다. 회계장부에서는 영수증 기록에 남겨진 조그만 단서를 추적해 사우나ㆍ사파리ㆍ렌트카 이용을 세금으로 충당한 사실과 부부동반 사실을 찾아냈다. 교민, 여행사, 대사관, 전 코트라와 상사 주재원을 대상으로 현지취재를 해 의원외교 백태에 대한 증언을 받아냈다. 시차관계로 현지취재는 새벽까지 계속됐다.
취재팀의 전화를 받은 많은 국회의원들은 현실론을 내세웠다. “의원외교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현안은 사실 거의 없다”, “평소에 못 가보는 나라에 가 색다른 문물을 체험하면 입법활동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는 논리였다.
국회의원들의 현실론 속에는 무기력감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수준의 해외활동을 어떻게 개선시켜 나갈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무했다. 부부동반으로 외교활동을 했던 의원들은 “선거 기간동안 고생한 와이프에 대한 보답 차원이었다”며 “경비는 개인적으로 처리했으니 문제 없는 것 아닌가”라고 설명했다.
“감시받지 않으면 썩는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오랜 교훈 중 하나다. 걸어다니는 헌법기관 국회의원은 행정부의 예산을 심의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쓰는 예산은 누구로부터도 감시받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감시받지 않기에 취재팀은 수천페이지의 회계장부를 직접 뒤져야 했다.
이번 보도의 문제의식에 공감을 표시한 의원들이 많았다는 점은 고무적이지만 아직은 소수에 불과했다. 쇠고기파동으로 국회가 외교활동은 커녕 기본적인 입법활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요즘, 대한민국 국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과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직감한다. 국회가 제대로 기능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기에 지속적인 관심과 문제제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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