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재벌 총수로서는 처음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 수감됐다. 뒷북을 치고 나선 언론의 집요한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던 김 회장은 결국 주요 혐의 내용을 시인했다. 스스로 거짓말쟁이였음을 인정한 셈이다. 재벌회장의 보복 폭행 사실보다 더 국민을 실망시킨 것은 끝까지 법과 국민을 기만하려 했던 김 회장측의 잘못된 처신이었다.
이번 사건은 언론이 자본 권력을 감시할 때 어떤 잣대가 필요한가에 대한 숙제를 남겼다. 사건이 불거진 초기, 재계 일각에선 자식 사랑이 남다른 ‘화끈한 성격의’ 기업인이 저지른 우발적 일탈행위쯤으로 과소평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일부 언론은 그런 목소리를 여과 없이 전달하며 진상 규명도 하기 전에 동정 여론부터 불러일으키려 했다는 혐의가 짙다.
김 회장의 미담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의 호탕함과 자상함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김 회장이 억울하게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을 개연성을 암시하는 등의 이례적인 보도까지 이어졌다. 특히 문제의 재벌 총수가 거짓말로 일관하다가 말을 바꾼 사실은 간과한 채, 피해자들이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했다는 주장, 그리고 구속 이후 회한과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근황을 여과없이 전하기도 했다. 초기의 익명 보도 사례를 생각하면 감싸기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하다.
신문이건 방송이건 익명 보도로 일관하던 초기에 이미 사건의 주요 얼개가 대부분 드러난 상황이었다. 발생 첫날의 익명보도는 신중함에서 비롯됐다는 해명이 가능하겠지만, 사흘 동안이나 인물은 없고 사건만 존재하는 희한한 보도가 경쟁하듯 이어졌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자본 눈치보기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정치권, 학계, 시민단체 관련 보도의 경우, 사실 확인이 어렵고 당사자가 강력하게 부인하는 상황에서도 과감한 비판 보도를 통해 성역을 파괴해왔음을 생각하면, 재벌 총수의 이름 숨겨주기 보도가 순수한 법률적 검토나 저널리즘 차원의 고민의 결과물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광고주의 영향력으로부터 신문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으로 인식돼 온 방송사들마저 재벌 총수의 이름을 감추는데 급급했음은 자본이라는 권력 집단을 대하는 언론사 내부의 인식이 어떠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김 회장의 실명 공개 보도로 전환된 이후, 언론의 보도 태도는 1백80도 돌변했다. 재벌 총수와 수사 당국을 성토하는 보도가 넘쳐났다. 마치 초기의 눈치보기 보도를 만회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취재 경쟁이 벌어졌다. ‘재벌과 조폭’이라는 강렬한 소재의 만남은 뉴스를 선정적이지 않으면서도 선정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냈다. 온갖 흥미 위주의 분석과 추측과 의혹제기가 이어졌다. ‘속보이는 소극적 보도’에서 ‘수사를 채근하는 적극적 보도’로 돌변한 배경에 대해 최소한의 해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재벌 총수의 무소불위 위상만 확인한 채 유야무야 넘어갔을 뻔한 이번 사건이 재벌 총수의 구속으로 진전된 것은 언론이 경쟁적으로 후속 보도를 내놓으면서 수사당국을 압박한 덕분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언론사들은 저마다 재벌 총수의 그릇된 처신과 경찰의 수사 과정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오랜만에 사회적 공기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을 즐기는 듯하다.
그렇다면 재벌 총수의 구속으로 사건은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잘못에 대한 대가 역시 차별적 특혜 없이 치르도록 감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보복 폭행 자체가 아니라 보복 폭행을 덮어두려고 공모한 그릇된 세력들의 존재이다. 재벌 회장 한 명의 구속으로 손 털고 끝낼 일이 아니다.
편집위원회의 전체기사 보기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