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폭행 의혹’이 경찰 수사가 진척되면서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다. 재벌 그룹 회장님이 직접 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민망한 의혹들이 양파껍질 벗겨지듯이 하나둘 사실로 확인되는 양상이다. 심지어 재벌 회장이 술집 종업원들을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 범서방파 행동대장 출신의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정황도 드러났다. 이만하면 재벌그룹과 조직폭력배들 간의 관계에 대한 의구심까지 자아내게 된다.
그런데 이번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의혹’에 대한 우리 언론의 초기 보도행태를 보면 권력 앞에서 속절없이 약해지는 그동안의 속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다.
모든 신문과 방송은 김 회장 사건을 다루면서 “모 그룹의 김 모 회장”이라고만 보도했지, 한화그룹은 물론 김승연 회장 본인의 실명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그것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사회면에 작은 크기의 해프닝성 기사로 보도했다. 보통 사회적 파장이 예상되는 사건의 경우 사건 현장을 찾아 관련자들과 인터뷰를 하며 실체적 진실을 좇지만 이 경우에는 이런 일반적인 취재관행도 전혀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 회장 사건은 일과성 사건으로 그냥 지나갈 뻔했다. 김승연 회장의 실명이 공개된 것은 첫 보도가 나간 뒤 무려 사흘이나 지나서였다. 첫 보도를 하지 않았던 한겨레신문이 뒤늦게 김 회장의 실명을 공개하자 나머지 신문과 방송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톱기사로 다루며 따라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그동안 유명 연예인이나 방송인, 고위직 공무원, 국회의원 등 이른바 ‘사회적 공인’들이 사소한 잘못으로 입건되거나 형사 고소됐을 경우 우리 언론이 보였던 준엄한 보도관행과도 사뭇 다르다. 이 경우 우리 신문과 방송은 그 사람의 실명은 물론 사진, 경력까지 친절하게 공개하며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사회적 모범을 보여야 할 공인으로서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재계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한화그룹의 실질적 소유주인 김승연 회장은 사회적 공인이 아니었던가?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난사를 한 것으로 밝혀진 조승희씨의 경우를 보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조씨의 이름이 미국 경찰에 의해 공개되자 우리 신문과 방송은 즉시 이를 받아썼다. 물론 “연쇄 살인범 유영철”에게 했듯이 조승희씨의 이름 뒤에서는 최소한의 호칭인 “씨”자도 빠지고 “범인 조승희”로 불렸다. 나아가 조씨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의 초등학교 학적부와 조씨 가족이 10년도 훨씬 전에 세 들어 살았던 집까지 찾아내 공개하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조씨뿐만 아니라 조씨 가족의 사생활에 해당하는 대목일 수 있지만 이에 대한 판단은 철저히 배제됐다.
우리 언론의 이런 이중, 삼중의 잣대는 권력에 대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혹자는 초기에 김승연 회장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사건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송의 가능성을 고려했을 것이라는 변론을 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적 공인들의 경우 단순한 고발사건만 발생해도 실명을 공개하는 관행과 어긋난다. 또 사흘이나 지나 실명이 공개되자 오히려 대대적인 경마식 보도를 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광고수입의 감소와 같이 재벌이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현실적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알아서 뺐을 것이란 해석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조승희씨 사건에서처럼 상대가 언론에 대항할 현실적 수단이 부족할 경우 무자비할 정도로 잔혹하게 다룸으로써 자신에 대한 도전의지를 사전에 꺾어버리는 관행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재벌의 눈치를 보다 뒤늦게 여론에 떠밀려 수사에 나선 경찰에 대한 우리 언론의 비난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화살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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