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열려도 우울하다. 작년 온 나라가 황망하고 어수선했다. 언론계만 그랬을까.
정치는 수십 년래 집권파 - 비집권파간 생존을 위한 소모적 이전투구여서 관전하는 것도 지겹다. 경제는 특정 분야만 수출의 기세를 올렸을 뿐 환율공세에 휘청거렸다. 문화는 상업적 활기는 넘쳐도 인문주의는 풀죽고 타인을 배려하는 교양은 비틀거렸다. 사회 전반적으로 흥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쾌활하게 콧노래 부르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다.
이런 난마의 어지러움 속에서 정권이 꺼내는 사회개혁 코드가 요긴할 것이며 남북통일 코드는 신선할 것인가. ‘코드’는 대망의 시기적절함과 비전의 설득력 속에서만 유효적절하다. 자기류(自己流)에 빠진 코드는 자기미망에 불과하다. 세론이 오가는 우물가에선 오래전부터 ‘조정자’의 부재를 탓해왔다. 21세기 사회 각계는 제 나름의 이익추구 투쟁, 권리확보 투쟁으로 요란하다. 그 옛날 독재정권처럼 찍어 누르지도 못하는 시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대를 꿰어주는 코디네이터의 등장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이유이다.
청와대는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담론의 발현지가 되지 못했다. 열린 시대를 그릴 수 있는 노무현정권 홍보라인의 상상력은 빈약했고 국민에게는 미래비전 로드맵이 다가오지 않았다.
반면 노 대통령의 정체성은 논쟁적 디테일로만 다가왔지 거시적 리더십으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청와대는 맞받아치는 돌출발언과 정제되지 못한 한탄으로 식상한 ‘뉴스거리’만 제공하고 있다. 출범초기부터 대의명분 하나로 기득권층을 소수특혜계층으로 몰아 부친 결과는 고스란히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되돌아왔다. 요소 요처의 그들은 똘똘 뭉쳐 와신상담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민층이 동조하고 지원하는가? 아니다. 노정부가 내세운 ‘다이나믹 코리아’는 공염불이 되가고 있다. 활력 잃은 경제는 고물가 실업 아파트값에 휘청거려 서민만을 욱죌 뿐이다. ‘노무현 학습효과’를 곱씹으며 올 연말의 대선을 겨누는 처지다.
물론 노정부는 정경유착을 현격히 감소시켰고 소외된 곳곳에 복지시스템을 설치했다. 인권을 배려하고 차별의 최소화를 차분히 진행시켰다. 스스로 권위를 해체하여 역대 최약체의 정권임을 자임했다. ‘권력의 무거움’을 덜었다는 평가는 애오라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진보에 대한 혐오감을 유발한 죄과는 어찌할 것인가. 수구적 가치를 퇴행시키기 보다는 득세하게 한 실책은 크기만 하다. 한국은 열려야 먹고산다. 국민적 열기를 펀더멘털 삼아 세계와 거래를 해야, 일용할 에너지를 얻는다. 이 풀죽은 국민적 펀더멘털을 어떻게 일깨울 것인가.
정권 초기의 독선적 예단이 지금은 커뮤니케이션 불감증으로 지병이 되고 말았다. 귀 막은 정권에 강호의 지식인들마저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고립되었다.
새해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청와대여! 참모들의 역할을 입체화 시켜라. 시대의식과 디테일 사안을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포지티브 역할과 네거티브 역할을 부여해 갑과 을이 논박해 보라. 4년을 소통능력 부재로 일관한 이즈음, 청와대는 자칭 ‘왕따’를 자초했으며 구중궁궐 ‘고독의 섬’ 그 자체다. 일방통행적 의사결정구조를 폐하고 시정의 논객들과 소주잔을 기울여보라.
남은 11개월은 짧고도 길다. 청와대 홍보라인의 새해 첫 업무는 ‘현장 경청’이다. 저널리스트 현장은 청와대가 ‘맞짱’을 떠야할 대상이 아니라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파트너이자 담론생산 동지들이다. 최고 책사 제갈량이 와도 한 칼에 풀기 어려운 시국이다. 그럴수록 귀를 열어라. 미디어 데모크라시(Media Democracy) 시대에 기자들에게 ‘발품, 땀품, 말품’을 부지런히 팔아라. 그것이야 말로 노정권의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가져올 수 있는 첫 단초가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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