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의 칼날은 소설 속 이미지를 뛰어 넘었다. 개발연대 ‘파쇼’라 일컬어지는 그것은 검은 장갑을 낀 공권력으로 다가왔다. 힘이 셌고 상식을 뒤엎어 버리는 권위를 지녔다. 한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맘껏 구사했던 독재 권력은 정보기관의 탐지력을 부리면서 가녀린 양심들을 마음껏 휘저었다. ‘빨갱이’는 내려오는 것보다 오히려 현장에서 만들어 졌다. 한번 찍힌 붉은 낙인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제대로 사람구실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젊은 좌절은 깊은 한숨 토하면서 자꾸만 저 밑으로 가라앉아야만 했다.
1980년대 중반 어느 대학교 도서관 앞. 앞장선 이는 마이크를 잡고 사자후를 토했다. 차가운 시멘트바닥에 앉은 이들은 구호와 함성을 토해냈다. 교문안팎 스크럼은 언제나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후세의 따뜻한 평가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유명 일간지 사회면 맨 하단 단 한줄 뉴스보도를 차마 기대하지 못했다. 매체는 너무 제도권적이었고 순응했다. 모든 것이 꽉 막히고 검열당하는 소통불능의 시대. 민주주의를 향한 외마디 지르기는 숨이 가빴다. 정치는 없었다. 관제의 정치꾼들만 신문에 등장했다.
대학생들은 오롯이 역사의 정의를 원했다. 없는 시간을 바쳤다. 하지만 펜을 든 열혈기자가 억누르는 자들의 본질을 꿰뚫어 칼날 같은 고발의 글 줄기를 뿌려대는 꿈은 지치지 않고 꾸었다. 무수한 서적들을 부지런히 읽었다. 정확한 시대의 논리를 찾아 군사정권의 후예들이 짜깁기한 역사의 뒤틀림을 제대로 해석하고자 했다. 바로 시대와 나라의 올바름을 위해서였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집회 참가도 용기를 필요로 했다. 불꽃같은 시간들이 바쳐져야 했다. 일상의 편안함을 보내버리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행위였다. 그 누구에게도 내세우지는 않았다. 때때로 다가오는 가투(가두투쟁)는 늘 오금이 저리게 했다. 서슬 퍼런 닭장차는 외면하고픈 치욕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꽉 막힌 나라에 민주화의 씨앗을 직접 뿌리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그 힘들고 고단한 일은 누군가 십자가를 메야 했다. 많은 익명의 대열이 필요했다. 리더를 받쳐주는 침묵의 조직이 있어야만 했다. 새 학문과 신흥 이론을 좇아 바다건너가 형설지공을 쌓는 일은 친구가 대신 해주기를 기원했다. 현장과 이론은 함께 어깨동무하고픈 마음에 그리움을 쌓았다.
세월이 흘러 민주화는 유혈의 광장과 숱한 이들의 죽음을 딛고 우리 곁에 강물처럼 도래했다. 국민은 철옹성의 정권을 탈권위의 권력으로 변화시켰다. 그 청년들은 큰 회사, 작은 회사, 언론사 편집국 보도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팀장이 되었고 데스크로 취재현장을 조율한다. 중견으로 전문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캠퍼스는 조용해졌고 도서관은 붐빈다. 20여 년 전 청춘들이 꿈꿨던 ‘그날’은 온 것인가. 지금이 바로 그날인가. 뭔가가 아쉽다.
숨죽이며 ‘그날’을 고대했던 젊은 가슴을 기억하자. 한 시절의 열정뿐이었다며 추억으로 밀어내지말자. 진정 나라와 인간의 행복을 가장 그리워했던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던가. 5월20일은 ‘기자의 날’이었다.
언론이 억압당해 자유언론를 외쳤던 저항의 역사가 배인 날이다. 초록의 파주 그라운드에서 기자들은 맘껏 축구공을 내지르며 지축을 울렸다. 한강변에선 기자 마라톤대회가 열려 펜을 든 건각들이 굵은 땀과 열기를 발산했다. 꿋꿋한 기자정신의 사표인 리영희 선생께서 제1회 ‘기자의 혼’상을 수상했다. 선생은 내내 사양했지만 “수상을 받아들임은 아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기자사회에 임무를 환기시키고 격려하고자 함”이라고 언명하신다.
미디어의 경영자는 수익모델을 찾지만 미디어의 기자는 진실 조각을 찾으려 오늘을 살고 있다. 자본은 필요한 것이지만 자본의 논리가 기자의 혼보다 앞서는 것은 처참한 길목이다. 민주화를 갈망했던 청년들이 중견기자가 되어 이제는 참 지성에 목말라하고 있다. 성숙한 지성은 스스로의 실천에서 나온다. 기자의 혼이 거세된 기사를 제조라인처럼 찍어내는 오늘의 일상을 되돌아보자. 한국 사회를 훨씬 더 아름답게, 지적으로 빛나게 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다. ‘21세기 기자의 혼’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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