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기자




  원용진 교수  
 
  ▲ 원용진 교수  
 
왕우의 <외팔이>에 환호했던 이들을 이후의 홍콩 무협 영화 앞에 세우면 침묵 일색이다. 같은 홍콩산 무협영화인 <동사서독> 앞에선 쩔쩔매는 모습을 연출하기 일쑤다. 두 팔을 가진 멀쩡한 무사가 악함을 앞에 두고도 미동조차 않음엔 분노까지 드러낸다. 한 팔의 무사가 기꺼이 내뽑던 검을 아끼고 있음에 이르면 답답함을 느끼며 스크린을 뒤로 하며 퇴장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왕가위의 <동사서독>은 그의 매니아들에게도 안절부절함을 선사했다는 소문이다.



외팔이 무사가 권선징악 시대의 아이콘이었다면 <동사서독>에 등장한 멀쩡하지만 무심한 무사들은 현실 속에서 규준을 찾지 못하는 지금의 아이콘이다. 왕가위의 무사들은 간혹 짧은 방백을 쏟아내곤 눈을 치어다 먼 산을 바라볼 따름이다. 그들 앞의 현실은 결코 과거 외팔이가 했던 것처럼 쾌도난마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가위는 내용보다는 별 의미 없는 것들을 담아내는 양식에 온갖 힘을 쏟는다. 스타일이 내용을 압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왕가위 스타일의 매니아들 말고는 감흥을 느끼거나 내용을 건지지 못하고 극장 안의 안절부절함은 당연해져 버린다.



왕가위와 동시대를 사는 기자들도 공통감각을 터득한 탓일까. 과거에 비해 스타일에 힘을 주는 보도가 눈에 많이 띈다. 여기저기서 뽐내기를 하는 기자들의 글솜씨와 말솜씨들을 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은 내용보다는 스타일에 더 큰 방점을 찍고 키 재기를 연출하고 있다. 나름의 스타일을 가진 문화평론가들이 문화관련 기자로 채용되는 것을 보면 틀린 지적은 아닐 것이다. 전하는 내용보다는 느껴지는 스타일에 방점 찍는 일이 몇 몇에 국한되지 않고 저널리즘 문화 안으로 왕가위식의 작업 바람을 불어넣음에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들린다.



현대의 소통 체제에서 스타일은 이미 인터넷의 게걸스러움에 의해 삼켜진 지 오래다. 인터넷 안은 그야말로 온갖 스타일의 각축으로 어지럽다. 누구라도 개성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온갖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과 말로 되지 않으면 그림으로 패러디로, 영상으로 개성을 뿜어낼 수 있다. 각자의 개성이 져야 할 사회적 책무(accountability) 또한 느슨하기에 스타일 왕국을 이루기엔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인터넷을 개성은 드러내되 그 내용은 부족한 허무 공간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이 인터넷 같아지길 바라지 않는 이들이 많듯이 기자들이 왕가위연하는 것을 인내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을 터이다. 지금은 인터넷과 신문, 방송이 같은 수준에서 경쟁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스타일에 물리거나, 사회적 책무에 대해 무관심함에 넌덜머리를 내는 이들이 많아지면 신문과 방송은 인터넷과의 경쟁이 아닌 구 매체간의 내용 경쟁으로 다시 돌아올 공산이 크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기자들의 내용 승부가 아닌 스타일 승부는 위태로워 보인다.



인터넷과의 경쟁을 긴 안목에서 보자면 신문과 방송은 스타일, 개성을 내용으로 담아내는 지혜와 노력의 발휘가 필요하지 않을까. 과거 한정되었던 정보원을 넘어서 다양한 원천을 개발하고, 그들의 소리를 담아내어 내용을 더 두텁게 하는 승부가 요청되는 셈이다. 스타일 보다는 내용이라며 고집하는 <외팔이>식 고집도 아니고, 내용보다도 스타일이 앞서야 한다는 왕가위식 허무함도 아닌 내용 안으로 스타일을 포괄해내는 지혜로움과 부지런함이 절실한 때다. 원용진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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