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C 최고 언론인 장지연·송건호] 구한말 일제에 맞선 격정의 언론인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로 을사오적 정면 비판, 투옥 마다않고 직필 고집한 민족정론 선구자

위암 장지연은 불의와 타협을 일절 거부한 격정의 언론인이다.



일제가 야금야금 우리나라를 침탈하던 구한말 언론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고, 국민의 주권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당시 언론인이 된다는 것은 곧 애국지사로 활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언론인으로서의 삶은 항상 일제와의 충돌과 그에 따른 고초로 점철되었다. 위암은 가장 투철한 언론인의 삶을 살았다.



위암의 성품이 가장 잘 드러난 글은 1905년 11월 20일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황성신문에 게재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이다. 위암은 일제의 을사조약 체결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이 조약에 서명한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 다섯 대신들을 "개, 돼지만도 못한 자"라고 꾸짖었다. 일제의 검열도 받지 않고 배포한 이 논설로 위암은 체포되고 황성신문은 정간을 당했다.



그러나 위암의 격정이 일제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제 할 일 못하는 동포들에게도 쏟아졌다. 황성신문은 국권 수호의 논조로 국민들에게 인기였지만 구독료가 제대로 걷히지 않아 늘 경영난에 허덕였다. 결국 1904년 1월 휴간에 들어갈 형편에 이르자 사장이던 위암은 논설에서 "기생 갈보집이나 골패 화투장에는 돈을 물 쓰듯 하면서 신문 값을 독촉하면 차일피일 미루니 이 어찌 야만인이 아닌가"라고 개탄했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독자들이 성금을 보내와 휴간 15일만에 속간할 수 있었다.



위암은 1864년 11월 경북 상주에서 출생했다. 1894년 2월에 진사병과에 급제한 그는 이듬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지어 각 처에 보내는 등 언론활동 시작 전부터 애국지사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위암은 1899년 1월 22일에 국한문혼용의 시사총보를 창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언론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해 8월에 시사총보가 폐간되면서 장지연은 황성신문의 주필이 된다. 이후 1902년 8월 31일에 열린 사원총회에서 남궁억에 이어 황성신문 제2대 사장으로 선출된다. 당시 황성신문은 특정인이 경영권을 독점하지 않고, 오늘날의 주식과 같은 고표를 발행하여 설립된 고금제 합자회사였다. 위암은 주필과 사장으로 있으면서 황성신문을 일제에 맞선 대표적 민족지로 키웠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황성신문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위암은 대한자강회를 설립해본격적구국운동을 벌이다가 1908년 1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되는 해됴신문(海朝新聞)의 주필로 초빙되어 이국땅으로 간다. 그러나 신문 경영난으로 곧 귀국하게 되고,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인 경남일보의 주필이 되었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의 국치를 당하자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경남일보에 게재하고, 결국 신문은 정간당했다. 이것이 위암이 언론인으로서 토한 사실상 마지막 격정이었다. 1913년에는 이미 재갈 물린 신문의 주필을 물러나 언론계를 완전히 떠났다.



이후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초빙도 받았지만 이를 단호히 거절한 위암은 술로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1년 세상을 떠났다.



한학에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한 위암은 광문사를 설립해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저서로는 <위암유고> <중보대한강역고> <대한신지지> <농정전서> <송산기> <대동시선> 등이 있다.



편집인협회는 위암의 업적을 기려 1964년 그를 유공언론인으로 선정했으며, 이보다 앞선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그에게 수상했다. 또한 언론재단은 1989년 위암 장지연상을 제정해 언론과 국학 부문에 우수한 업적을 남긴 자에게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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