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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용진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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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영화 흐름을 칭하는 말이다. 아직 적절한 한국이름이 없어 아쉬운 표정들이긴 하지만 영화 이론가들은 그에 대해 제법 두터운 논의들을 펼쳐왔다. 이 범주 안에 영화이론가들은 ‘파이란’ ‘박하사탕’ ‘초록물고기’ ‘아름다운 시절’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동감’ ‘시월애’ ‘번지 점프를 하다’등을 꼽아 심는다.
한 이름 아래 묶이는 이 영화들은 가족적 유사성을 지닌다. 이 영화들은 대체로 어둡다. 답답하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을 듯 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들은 우울의 감정구조를 공통점으로 지니고 있다. 어둡고, 답답하고 그래서 우울한 감정을 품겨낸다. 영화들에는 현실을 적응하지 못하거나 그래서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며, 못 마땅하게 여기는 내용과 등장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이 영화들은 현재에 대한 불만 그로 인한 불안을 과거로 용해하려 시도한다. 과거를 현재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이는 플래쉬 백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단순함과는 차이가 있다. 과거와 현재를 병렬시키고, 그 둘을 융합시켜 나간다. 영화 안에는 비동시적인 것이 동시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현재에 대한 불안함을 ‘과거+현재’라는 새로운 시공간 속에서 해소하려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단순한 플래쉬 백 식의 향수가 아닌 것은 ‘과거+현재’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적 징후에 대한 이 같은 설명이 맞다면 우리가 사는 오늘은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오늘과 어제의 경계가 무너져 있는 지금. 그 곳과 이곳이 겹쳐져 있는 이 곳. 현재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한 대안으로 찾아진 과거가 갖는 미래성. 우리가 사는 오늘 이곳은 일종의 혼성 공간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 공간에서는 어느 것도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과거와 현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엉킨다. 미래 또한 과거와 현재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지 않는다.
우상과 강력한 국가주의, 물리적인 강압을 떨치고 난 후에 오는 허전함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앞만 달려가다 호루라기 부는 사람, 호루라기 소리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후의 당혹감일 수도 있다.
영화가 과거를 현재와 뒤섞으면서 불안해소를 모색했다면 한국의 언론은 이 허전함과 당혹감에 대해 어떤 해법을 내놓고 있는가. 불행히도 일부 언론은 호루라기 부는 이를 새롭게 내세우고, 호루라기 소리를 복원하고, 옛날처럼 함께 달려가자고 부추기고 있다. 그 영화들과는 달리 플래쉬 백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과거를 현재 속으로 끌어오는 영화와는 달리 일부 언론은 현재를 과거로 가져가려 한다. 관습 속으로 몰아넣으려 하거나, 일사 분란하여 아름다웠다며 독재시절로 끌어당기려 하거나, 불안해 못살겠다며 과거처럼 대국에 기대어 행복했던 시절로 돌리려 하고 있다.
그 퇴행적 주창 속에는 현재가 없다. 미래에 대한 모색은 더더욱 없다. 뒤돌아서서 과거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꼴을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간혹 포스트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들에서 찾아지는 과거를 통한 미래적 모색도 찾기 어렵다. 과거회상, 관습, 일사 분란함, 호루라기 소리, 흑백 사진…. 이것들이 한국 사회를 주도한다며 큰 목소리를 내는 일부 언론들이 쏟아내는 소리, 냄새이며 색깔들이다.
그 소리, 냄새, 색깔들로는 자신들의 당혹감과 허전함을 해결하고 채울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잠깐일 따름이다. 가끔씩은 영화적 지혜가 필요하기도 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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