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공간에 새 바람을…




  원용진 교수  
 
  ▲ 원용진 교수  
 
신문은 한 때 시간을 중요시 여기는 매체였던 적이 있었다. 속보를 기반으로 타지의 소식들을 빠르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던 때 신문은 다분히 시간과 관련된 매체였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신문을 시간과 연결짓는 이들은 많지 않다. 신문은 이제 그 어떤 수단으로도 다른 보도매체의 시간성을 따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탓에 신문은 자신의 매체 성격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시간적 매체라는 성격의 수정 이후 신문은 공간적 매체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었다. 시, 공간에 걸쳐 있는 사건, 사고를 공간에 재배치함으로써 영향력을 높이는 매체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전에 없이 신문은 자신의 공간 배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화려하게, 리드미컬하게, 근엄하게, 보기 좋게 등등 눈길을 끌기 위해 온갖 맵시를 다 부린다. 다른 신문과 차별을 둘 목적으로 배치 순서(페이지네이션)를 달리 해보고, 과감한 레이아웃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단장을 해 공간 배치된 신문은 이른 아침 가정이라는 공간으로 스며든다. 낯선 공간에 스며들면서 신문은 비로소 공간 배치의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독자의 눈은 신문의 공간 배치에 따르면서 머릿속에 최근의 세상을 배치하게 된다. 그 다음 사건, 사고들은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재연된다. 신문의 공간 배치작업 대로 세상이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플래쉬 백 되는 셈이다.



이는 물리적 공간 배치 방식이 갖는 힘에 비유될 수 있다. 가정 내 방 배치를 예로 들어보자. 공부방에서는 공부를 하고 거실에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대화를 나누기 마련이다. 부모의 방에 아이들의 접근은 금지된다. 신문의 공간 배치도 그와 유사한 효과를 얻는다. 경제면에 적힌 내용은 경제적으로 해석하려하고, 정치면에 적힌 내용은 정치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청소년 이야기가 사회면에 주로 적히게 되면 청소년은 문제의 영역으로 인식된다. 사회면에 등장한 인물이나 단체는 그 내용과 별 관계없이 대체로 어두운 것으로 기억된다.



신문은 공간 배치가 내용을 압도하는 일을 자주 목도하면서도 그에 대한 깊은 사색을 피한다. 공간을 화려하게 만드는데 들이는 공에 비하면 공간 구획이 잘 되었는지를 따지는 일에는 인색한 듯 하다. 구획된 공간들의 틈새가 발생함에도 재 정리해보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탓인지 전혀 엉뚱한 공간에 끼워져 외롭고 초라해 보이는 기사를 접하는 일도 허다하다. 세상이 바뀌어 자신이 공간 관련 매체로 바뀌고 있음에도 정작 그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성, 생활… 등등의 신문의 공간 정리방식은 너무 익숙해 버리기 아까운 자산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공간 배치방식으로 인해 독자들이 세상의 복잡성을 단순화시켜 버리거나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음을 외면하지는 말아야겠다. 이미 물리적 공간의 엄숙성과 경직성도 탈바꿈하여 거실이 서재를 겸하고, 부모의 방이 거실을 겸하는 일도 허다해지고 있지 않은가. 공간 관련 매체로 성격을 굳히고 있는 신문이 그 같이 거침없이 바뀌고 있는 공간의 새바람에 무신경해서야 어찌 그 미래를 걱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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