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전규찬 교수 |
|
|
문화연대를 비롯해 진보네트워크센터, 지문날인반대연대 등으로 구성된 ‘프라이버시법제정을위한연석회의’가 최근 개인정보 유출 문제에 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한 바 있다. 법제도적인 보호 장치 없이 구축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 공공장소에 마구잡이로 설치된 폐쇄회로TV, 그리고 주민등록번호 등의 문제를 다룰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설립과 개인정보보호기본법 제정을 재차 촉구한 것이다.
자본과 국가로부터 인권을 보호하는 것은 억압된 공공영역을 회복하는 일과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진보적’이라 이름 붙여진 운동단체들이 개인의 자유, 사생활, 프라이버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사회적 층위로 끌어올려 급진적으로 풀이하는 모습은 크게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보수신문들이 동일 사안에 대해 기울이는 관심은 여전히 흥미롭다. 세계일보가 시리즈물로 연재했을 뿐 아니라, 동아일보도 최근 몇 차례 프라이버시 문제를 다루었다. ‘프라이버시의 종말?…무인감시장치 어디까지 왔나’는 보도는 그 대표적 예가 된다.
빅브라더의 출현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막연하긴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 얼굴 사진이 찍히고 신원조회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다가오지 않도록 제도적인 규제 장치가 마련돼야 할 시점”이라고 결론 맺는다. 헷갈린다.
명백히 ‘보수지’로 분류되는 신문이 개인의 자유 보호를 위한 사회적 장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분명 리버럴리즘의 얼굴이다. ‘리버럴’의 배움을 통해 기존의 이념 경직성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성찰의 제스처인가?
그렇다면 응당 인권에의 관심은 국가보안법의 거부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이익’, ‘전체의 질서’를 위해 개인이 지닌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와 리버럴리즘은 결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신문에 그런 일관성을 기대하기는 현재로서 한참 무리다. 국보법 반대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한점 보수의 양보를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리버럴리즘을 신자유주의로 전유하고, 시장으로 해소된 리버럴의 가치를 보수적 이념과 접합시키려는 조직화된 작전 전개 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을까?
성매매특별법에 관한 보수 신문들의 반응을 봐도 이런 의심은 더욱 확고해진다. 조선과 동아는 전통적 성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한발 물러나 남성중심 시장 이데올로기와 조화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대표적 가족주의자인 강지원 변호사와 한경연 규제연구센터 소장이 “법 규제 논쟁보다 일그러진 성문화 자성부터”라는 제목 아래 좌담을 펼친다. 시장과 전체의 화해는 서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 묘한 결탁의 희생자는 진보주의가 아닌 리버럴리즘이다. “보수혁명이 필요하다”는 동아 신지호의 글을 보자. 보수학자가 보수지면을 통해 보수혁명을 말하는 걸 말리고 싶지 않다. ‘386 골수 사회주의자’였다던 그가 어찌 ‘자유주의자’로 변신했는지에 관해서도 관심이 없다. ‘자유주의’로 보수진영을 ‘補修’하자는 그의 제안은 앞선 본인의 진단이 옮음을 증명할 따름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통해 신장되는 소수의 자유보다 신문법과 과거사진상규명법 제정으로 희생되는 다수의 자유가 훨씬 크다”는 억견과 리버럴리즘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란 ‘신보수’의 번역어에 불과하다.
보수 신문의 신자유주의 공세와 구별되는 리버럴리즘 담론 배치가 경향이나 한국을 중심으로 강화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억압과 불평등의 추방, 표현과 사상의 자유라는 리버럴의 코드에 기반을 둔 언론 실천이 튼실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한겨레는 진보의 행보를 서두르고 조선과 동아는 원위치로 돌아가게끔 리버럴리즘의 지대를 넓혀야 한다. 그래야 기자도 무리하지 않고 독자도 헷갈리지 않아 좋다. 보수는 보수 이념, 리버럴은 리버럴의 신념, 진보는 진보적 주장을 갖고 경합하는 넓은 스펙트럼의 이념 게임이 아름답다. 그게 진정한 리버럴이 꿈꾸는 언론 풍경이기도 하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