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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용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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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문명사상가이며 문화 이론가인 레이몬드 윌리엄스. 그는 철도 간수의 아들로 태어났음을 늘 자랑으로 여겨왔다. 그런 탓인지 그의 많은 저서나 연구업적들도 문화, 문명의 계급적 불균등 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화와 문명의 진전에 숨겨져 있는 계급적 편견, 비 주류적 삶에 대한 외면 등을 윌리엄스는 밝혀냈다. 후대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예술적 작품들 속에도 엄청날 정도의 주류 일변도 편견이 숨겨져 있음을 드러냈다.
19세기 예술 분석의 한 저서에서 윌리엄스는 문학작품 내 도시 묘사가 얼마나 계급적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윌리엄스는 문학작품에 드러난 도시 묘사 분석을 통해 묘사법이 두 가지 방식으로 대별된다고 파악했다. 그 첫 번째는 원경묘사이고, 두 번째는 스케치였다. 원경 묘사는 영상제작에서의 멀리 찍기(롱 샷)에 가깝다. 영상제작에서의 클로즈업과 스케치 묘사법은 상동성을 갖는다. 원경 묘사는 대상들을 파노라마 원근법 속에 질서 정연하게 위치시킨다. 그와 반대로 스케치 묘사법은 도시적 삶의 구체성과 역동성을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윌리엄스는 장르별로도 묘사법 채용이 달랐음을 강조한다. 고급 장르에 속했던 시가 원경묘사법을 채용한 반면, 대중장르인 소설은 스케치 기법을 사용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속칭 1급 작가들이 원경 묘사법을, 2급 작가들이 스케치 기법을 활용했음도 덧붙인다. 고급작가와 고급 장르는 먼 거리에서 도시의 외관을 보고자 했던 반면, 대중 작가와 대중 장르는 걸음을 더욱 대상 쪽으로 옮겨 구체적 삶을 그리고자 했던 셈이다. 주류는 멀리 찍기를 비주류는 클로즈 업을 채용해왔던 것이다.
윌리엄스의 문학적 논의는 한국 언론의 분석틀로도 몫을 할 수 있을 듯 하다. 도시화와 같은 불가역적 역사 진전을 원경법으로 그리려 했던 고급작가, 고급장르를 따르는 경향을 한국 언론에서 찾기란 어렵지 않다. 고층빌딩 높은 곳에서 멀리 세상을 바라보는 추상성으로 역사의 진전을 관조하며 훈수하는 수준에 머무는 일은 이미 정형화되어 있다. 꿈틀거리는 육체와 거친 숨소리를 담는 스케치 묘사법은 언론이 가끔씩 구사하는 기획이나 특집을 통해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탓에 수용자들의 심리적 동일화 수준이 높지 않고, 점차 수용자들은 그에 신뢰를 주지 않게 된다.
불가역적 역사진전을 원경법으로 지켜보는 한국 언론은 낭만주의적이고 노스탤지어적인 결론으로 마감하는 경향이 강하다. 뒤돌아선 채 앞으로 나아가는 불안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다. 그래서 언론은 결코 지울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잠식된 영혼들로부터 동일화를 구할 뿐이다. 안정적 질서의 혜택으로 살아온 이들로부터 퇴행적, 노스탤지어적 동의를 구하는 반면 변화를 온 몸으로 맞으며 힘들게 살고 있는 삶들로부터는 외면을 당한다.
윌리엄스의 해석에 따르면 불가역적 역사 진전을 원경으로 묘사하던 작가와 장르들도 결국엔 스케치 기법을 채택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한다. 도시를 피하고서는 삶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는 도시적 삶을 스케치 묘사법으로 구체적으로 그려내는데 동참했던 것이다. 역사의 필연을 맞닥뜨리지 않고서는 그 어떤 기호(記號)적 행위도 사회를 살아남기 힘들다는 교훈처럼 들린다. 윌리엄스가 내린 결론이 한국 언론에도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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