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김우중 마케팅에 놀아난 언론

'인연'에 얽매이지 말고 대우 모래성 파헤쳐야





이춘발 기자협회 고문. 제 28대 회장

언개연 법률피해구제본부 부본부장



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국민당 후보로 나섰던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정적(政敵) 아닌 정적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두 분 관계는 편한 사이가 아니었다. 정 회장은 유세 기간 동안

“김우중 씨는 자신의 손으로 세운 기업이 하나도 없다. 남이 키워놓은 기업을

삼켜서 오늘의 대우그룹을 만든 인물이다”라고 비난했다.



이 발언에 격분했던 김우중 회장은 거의 반공개적으로 정 회장의 낙선운동을

폈으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도 후보로 나서겠다는 발언을 하면서까지 정

후보의 자진 사퇴를 압박했다. 이후 낙선한 정주영 씨와 현대그룹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언론은 정부가 의도한 대로 정 회장과 현대그룹을 철저하게

해부했다.



탈세혐의로 졸지에 피의자 신분이 된 정 회장이 2년여를 넘게 재판소를 오갈 때

김우중 회장은 세계경영의 화려한 구호를 외치면서 재계를 리드했다. 때문에 김

회장이 그룹 몸집을 맹렬하게 불리고 있을 때도 언론은 늘 김 회장의 밝은 면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데 치중했다. 김 회장은 여느 유력 정치인보다도 대중성이

높은 재벌총수임에 틀림없다.



물론 김회장은 그 자신이 뉴스메이커로서뿐만 아니라 유력 언론사나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을 활용하는 점에서도 남다른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대량의 언론인들이 거리로 쫓겨나게 되자 주위 눈치 아랑곳 하지

않고 10여 명에 이르는 해직 언론인들을 과감하게 고용했으며 이에 앞서 78년에는

거액의 사재를 들여 언론재단을 발족시켰다.



김회장은 역시 언론마케팅 분야에 있어서도 뛰어난 총수였다. 이같은 김 회장에게

언론은 수많은 찬사를 보냈다. 샐러리맨의 우상, 1년 중 해외출장이 가장 많은

총수, 파아낸싱의 귀재, 일밖에 모르는 총수, 가장 짧은 시간에 재벌을 일군 인물

등등. 김회장은 실로 대단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IMF사태 와중에 각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몸집을 줄이는 시점에서도쌍용자동차를인수한다고 했을 때

경제문외한인 필자는 솔직히 “어디서 그 많은 돈이 있어 인수를 하는가”하는

의구심과 함께 “과연 김 회장은 대단하구나” 하고 놀랐다.



수십 명의 대우그룹 출입기자와 금융계 전문기자가 있었건만 대우의 자금문제를

제대로 파헤친 매체는 한 곳도 없었으니 그 책임을 어떻게 다 할 것인가. 일본

노무라(野村) 증권이 낸 대우그룹 ‘자금악화설’이 외신으로 전해졌을 때도 우리

언론은 ‘음모’라는 김 회장의 해명을 열심히 중계하는데 그쳤다.



언론의 보호 속에 김 회장은 결국 희대의 금융파산 기록을 세웠다. 정부 발표만

받더라도 대우그룹의 부실액은 31조 규모에다 그 중 20조 원에 이르는 돈의

행방은 묘연하다는 얘기다. 대우는 문자 그대로 이 나라를 대홍수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최근 김우중 회장의 거취는 언론의 사정권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적어도 김 회장은 지금도 언론의 비호속에 소나기를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과연 다른 기업이, 다른 재벌 총수가 이토록 엄청난

사건을 냈을 때도 이처럼 관대할 것인가. 당사자에게는 대단히 송구스런 일이지만

우리 언론은 이제라도 김 회장이 쌓아놓았던 대우 모래성의 실체를 보다 철저하게

분석해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천문학적인 부실을 쌓았으며 어떤 곳에 얼마를

어떻게 썼는가를 정밀하게 추적하고 파헤쳐야 할 것이다.



은행의 공적자금이 투입된다고 어렵게 쓸 것이 아니라 일년 국가예산의 4분의 1에

이르는 국민 혈세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집중 취재해야 한다. 산업정책 당국이나

금융관련 기관의 커넥션은 없었는지, 정·관계의 비호세력은 누구인지, 이것은

제2의 대우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일년 내내 특별취재를 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사건이다.



언론이 김 회장과 맺은 30여 년의 은덕으로 그를 비켜가려 한다면 혈세를 빼앗긴

대다수 국민들의 손실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그것은 언론문건이나

옷사건보다도 중요하고 실질적인 국민생활 사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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