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을 두 달 앞둔 지금 한국언론의 자화상은 참담하다.
'언론대책문건'은 기자들이 북치고 장구치고 한 꼴이 되었다. 문건을 만든 건 신문기자였고 퍼뜨린 건 방송기자였다. 그 덕분에 기사를 써야할 기자가 거꾸로 취재 대상이 되어 연일 지면에 대문짝 만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작성한 기자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언론을 '바로 세우기'위한 방법을 정치인에게 시시콜콜 알려줬다. 이것을 여권에서 획득한 기자는 작성자도 분명하지 않은 문건을 야권에 넘겨줬다. 취재과정에서 얻은 비밀을 여야를 넘나들며 풀어놓았다. 기자가 대서사인지 정보원인지 모를, 갈 데까지 간 모습이다. 이 정도면 권언유착을 넘어서 아예 권언의 '화학적 결합'이 아니겠는가.
이 문제를 다루는 많은 언론들은 한술 더 떴다. 사실여부에 대한 확인보다 본질을 비껴간 문제로 호들갑을 떠는가 하면 자사에 관련된 내용을 입맛에 맞게 각색해 보도하는 민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언론인과 정치권의 추한 거래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가까이만 보자. 92대선 때는 기자들의 동향보고서가 김영삼 당시 민자당총재에게 보고된 'YS장학생' 사건이 있었다. 97대선 때는 이회창후보의 전략을 세밀히 조언하는 '선거대책 문건'이 폭로돼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모두 기자 개인이 혹은 조직이 개입된 사건이었다. 정치권만이 아니다. 내부정보를 빼돌려 주식투자로 이익을 챙겼다가 망신을 산 기자가 있는가 하면, 특기생 입시에 개입해 거액을 받은 이도 있다. 여기 막으면 저기서, 저기 때우면 또 다른 곳서 터지는 언론인들의 비리는 분야가 따로 없다. 반성은 잠시,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이를 기자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는 시도는 무책임하다. 그렇러면 특종기사도 조직의 영광이 아닌 단지 혼자의 일인가.
기자는 진실을 먹고 산다. 순도가 떨어지는 기사는 조금씩 체내에 쌓이는 독약이 되어 결국에는 기자 자신과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다. 기자가 취재원과의 거리를 잊으면 그의 정보원이나 나팔수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그러한 폐해를 수없이 보아왔다. 가장 먼저 개혁해야할 대상인 언론이 가장 멀쩡하게 버티고 있다는 비판은 그래서 반박하기 힘들다. 이제 여기를 바닥으로 삼자.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다. 낯뜨거운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내부개혁의 시작이다.
우리에겐 자랑스런 전통이 있다. 자유언론을향한빛나는 투쟁의 전통이다. 온갖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꼿꼿이 살아온 우리의 선배들은 시대를 비춰온 등불이었다. 세상은 달라졌어도 그 근본정신은 여전하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것이 땅바닥에 떨어진 언론윤리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책임감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들먹일 것까지 없다. 상식으로 판단하자. 그리고 기사로만 말하자. 그 뒤에 어떤 정치적인 계산이나 이권이 개입돼서는 안된다. 기자는 정치꾼이 아니다. 장사치도 아니다. 지금도 우리 옆에는 수첩 속의 윤리강령을 되뇌이며 '기자의 길'을 다지는 동료들이 있다.
편집국의 전체기사 보기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