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남이가에서 '우리는 남이다로

언론에 보도된 언론계 사건들

최근 언론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론사 세무조사, 즉 언론계 뉴스다. 언론사들은 저마다 매체담당 기자 수를 늘리거나 별도의 팀을 신설, 취재를 강화하고 그 결과를 지면이나 전파에 담아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비판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언론사를 상호 견제, 감시함으로써 언론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란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럼 과거에는 어땠을까. 어떤 언론계 사건들이 지면과 전파를 통해 알려졌을까. 사실 언론사들의 언론계 뉴스보도는 시대에 따라, 특히 그 시대 권력과의 관계나 언론사간 경쟁 등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여왔다.





방송장악 음모 맞선 파업투쟁

특히 일상적으로는 “우리가 남이가”로 상징되는 동종업계임을 앞세워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지만 자사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에 대해서는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인 게 90년대 후반의 모습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96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이른바 ‘신문전쟁’이다.

그해 7월 15일 조선과 중앙의 일선 지국 간부들 사이에서 벌어진 관할권 다툼이 살인사건으로 비화된 직후 동아, 조선, 중앙, 한국 등 주요 신문들은 자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신문을 표적으로 정하고 지면을 통해 공세를 퍼부었다. 이런 신문들의 행태는 과당경쟁의 당사자로서 책임의식은 커녕 지면을 사유화한다는 언론·시민사회단체들의 빗발치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의 언론계 뉴스가 이런 신문사간 경쟁을 중심으로 형성됐다면, 90년대 초반은 노태우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에 맞선 방송사 노조들의 방송민주화를 위한 파업투쟁 등이 언론의 관심사였다.

6공 정권이 방송제도연구위원회 구성을 통해 방송장악 의도를 노골화한 가운데 터진 90년 2월의 ‘KBS 법정수당 변칙지급’ 보도 파문은 곧 서기원 사장 임명을 둘러싼 KBS 노조와 정권과의 갈등으로 비화됐다. 91년 1월엔 평화방송노조가 경영진의 부당 간섭과 노조간부 해고 등에 반발, 6개월여 동안 파업을 벌였으며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인 92년 9월 노조 무력화를 시도하는 정권과 경영진에 맞서 MBC 노조는 파업을 결행했다.

낯뜨거운 사건도 잇따랐다. 국제적 망신으로 번졌던 91년 1월의 수서사건 관련 거액 촌지수수 파문과 같은해 8월 공개된 보사부 기자단 촌지사건이 그것이다. 이를 계기로 언론계 내부에선 또 다시 자정의 목소리가높아졌다.



언론통폐합 숨은 그림 찾기

12·12 쿠데타와 80년 광주학살로 집권한 신군부의 극심한 언론통제라는 불가항력적 요소가 없진 않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 언론은 언론계 뉴스는 고사하고 사회적 쟁점에 대한 사실보도를 스스로 외면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런 80년대를 대표하는 언론계 뉴스로는 87년 6월 민중항쟁에 힘입어 창출된 88년 ‘여소야대’ 정국 아래서의 언론청문회와 그 도마 위에 오른 신군부의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사태다.

같은해 12월 12일 국회 문공위 청문회장에 증인으로 출석한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등 당시 4대 일간지 사주들과 해직기자들이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중계됐다. 시청자들은 사주들이 언론인 강제해직 당시 개입여부를 묻는 의원들과 설전을 벌이거나 변명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다.

사실 80년 당시 언론사들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를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이란 자율결의의 형식으로 공표했으며 이를 각 사의 지면과 전파를 통해 아무런 비판 없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또 언론사들은 신군부의 강압임을 내세워 80년 8월 이후 1000여명이 넘는 기자들을 거리로 내몰았으며, 88년 청문회 당시엔 이 가운데 적지 않은 인원이 신군부가 아닌 언론사 자체 결정으로 해직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80년대 후반에 또 기억되는 사건은 노태우 정권의 한겨레신문에 대한 잇따른 탄압이다.

87년 대통령 선거직전 정부가 작성한 언론인 개별접촉 보고서를 입수, 폭로해 정권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한 한겨레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노태우 정권은 89년 4월 문익환 목사와의 방북 협의를 문제삼아 당시 한겨레신문 리영희 논설고문을 구속하고 방북취재계획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임재경 부사장 등을 연행했다. 또 같은해 7월엔 서경원 의원 입북사건과 관련, 윤재걸 기자에게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한 데 이어 그달 12일에는 관련자료 압수를 명목으로 한겨레 편집국에 경찰병력을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노태우 정권의 행태는 언론사를 의도적으로 유린하는 한편, 통일문제에 대한 취재활동을 정부통제 아래 두려는 의도를 보여준 만행이란 비난을 샀다.



언론자유실천운동과 ‘1단’투쟁

60∼70년대는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에 맞선 선배언론인들의 언론자유실천운동의 진실이 ‘1단 기사’에 담겨 전파되던 시절이었다.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시작한 언론자유실천선언은 순식간에 각 언론사로 번져갔고 또 이런 사실은 기자들의 강력한 요구로 1단으로나마 지면에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런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실천운동에 대해 74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7월 14일까지 무려 7개월 동안 광고주들에게 광고를 게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언론탄압을 자행했다.

또 권력의 강압에 굴복한 사주들은 언론자유실천운동을 주도한 기자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기자들은 저항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언론자유수호를 위해 항거하던 기자들이 대량 해직된 뒤 박정희 정권은 75년 5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해 언론보도를 철저히 통제했으며 언론은 또 유신정권의 ‘포장된 진실’을 앞다퉈 보도하기 시작했다.

유신철폐와 민주화요구를 위한 학생이나 재야단체들의 성명이나 노동자, 농민들의 시위 등은 지면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오히려 유신체제를 미화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례로 7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영일만에서 석유가 발견됐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자 언론은 마치 석유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처럼 흥분에 들떴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기적 같은 기쁨을 감추기 어렵다. …우리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면 하느님이 좋은 선물을 줄지도 모른다”며 찬양 일변도의 논조를 폈다.



폭행과 테러로 얼룩진 60년대

60년대는 폭행과 테러, 불법 연행 등 언론인의 수난이 거듭된 시기였지만 언론은 보도통제 등으로 그 실상을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다.

박정권은 언론윤리위원회 제정이 언론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자 정부 비판보도를 막기 위해 물리적 가해를 일삼았다. 64년 11월 조선일보의 ‘남북한 UN동시가입 제안준비’란 제목의 기사와 관련해 당시 조선일보 선우휘 편집국장과 정치부 이영희 기자가 구속됐으며, 65년 12월에는 ‘간첩의 무전기 권총 발견’ 기사로 매일신문 김창식 편집국장 3명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등 언론보도와 관련된 기자와 편집간부의 구속사태가 잇따랐다.

언론인에 대한 테러도 극심해 64년부터 66년 사이 기자협회가 확인한 사례만해도 15건에 이른다.

이같은 60년대 후반의 언론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최석채 당시 편협 회장이 “신문은 편집인과 기자의 손에서 떠났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신동아 필화사건이다.

67년 6·8총선에서 개헌 가능 의석을 확보한 박정권은 언론통제를 강화하기 시작, 이듬해인 68년 11월 23일 신동아 12월호의 ‘차관(借款)’이란 제목의 특집기사와 10월호 ‘북괴와 중소분쟁’이란 기사를 트집잡아 당시 홍승만 주간과 손세일 부장 등을 중앙정보부로 연행, 구속했다.

동아일보는 당초 이런 연행사실을 엿새 뒤 보도하고 천관우 주필이 사설을 통해 반공법 위반혐의 적용이 부당하다며 문제를 제기했으나, 곧이어 김상만 발행인과 천 주필까지 연행되는 상황에 이르자 12월 7일 사과사고를 내고 타협을 시작했다. 9일과 11일에 걸쳐 천관우 주필, 홍승만 주간, 손세일 부장 등 3명의 사표가 수리됐다. 18일에는 발행인이 고재욱 사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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