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검찰은 너무 조신하게 징계했다
여기자 성추행 검사 늦게나마 조치 환영하나 내용 미흡해 유감
김미경한국기자협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지난 9일 열렸던 법무부 징계위원회는 대한매일신보 여기자를 성추행한 서울 동부지청의 박충근 검사에 대해 4개월여의 심사숙고(?) 끝에 ·경근신'이라는 징계처분을 내렸다. 경근신이란 ·직무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전과를 회개하게 한다'는 것으로 25일간 반성문을 쓰고, 앞으로 호봉산정과 승진에서 6개월 경력 삭감 벌칙을 받는 조치라고 법무부쪽은 설명했다.
여론이 잠잠해지는 틈을 타 유마무야 넘어가려 하지 않고 법무부가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징계 처분을뒤늦게나마 내린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성희롱 관련 제재조치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벌이 아닐 수 없다.
지난 9월 7일 미국 포드 자동차회사는 시카고 소재 2개 공장에서의 여직원 성희롱과 관련한 연방 차원의 제소사건 해결을 위해 775만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포드는 성희롱을 알고도 대응조처를 취하지 않은 감독자는 승진 대상에서 제외시키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7월에는 다임러크라이슬러사 미국 공장의 한 여성 직원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2100만 달러(약 252억원)의 성희롱 손해배상소송에서 이겼다.
국내에서도 지난 7월 제자 여학생들을 술자리에서 껴안는 등 성추행을 한 교수에 대해 교육부 교육공무원 특별징계위원회가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내리기도 했었다.
물론 박충근 검사의 성희롱은 앞에서 든 사건들과는 달리 일회적이고 피해당사자의 고소가 없었다는 점 등에서 심각성이 덜 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희롱 가해자가 법의 집행과 유지를 담당하는 검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사건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성희롱범에 대한 처벌을 내려야 할 검사집단이 내린 자체 성희롱 사건에 대한 결정은 앞으로 발생할 각종 성희롱 사건에 대한 법조계의 시각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성희롱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대처 방침을 밝혀온 정부와 사법부의 의지를 확인시켜줄 잣대였다는 점에서 보다 강도높은 징계가 필요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이 사건의 피해자가 기자였다는 점도 다시한번 주목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자이기 때문에 더 강도높은 징계가 필요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언론기관이라는 막강한권력집단(?)이배후에 있는 조직의 피해자에 대한 처벌이 이 정도라면 일반 여성들이 피해를 당했을 경우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될 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난 5월7일 사건이 발생한 직후 한국기자협회 여성특별위원회 뿐 아니라 각 여성단체들은 해당 검사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면서 앞으로 재발 방지를 위한 조처를 내놓기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법무부가 내놓은 것은 ·대낮 폭탄주 금지 조처' 밖에 없었다. 그마저 현재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이 검사의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앞서 과음을 원인으로 보는 법무부의 시각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법무부가 박 검사 개인에 대한 경근신 처분에 그치지 않고 성희롱 방지를 위한 검찰과 사법부 전반의 대책을 내놓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과 관련한 언론의 태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리는 이 사건이 여성기자에 대한 성희롱 사건이었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에 대한 성희롱 사건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어져야 했다고는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언론기관의 특권의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언론을 제외하고 사건 자체와 징계결과가 보도되지 않은 것은 문제점이 있었다. 이 사건은 검사가 여기자를 추행하고 여기자가 문제제기를 하고, 수십개의 여성단체들의 항의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말 그대로 '팩트'만으로도 충분히 기사가치가 있었다. 의미를 떠나서 언론이 즐겨찾는 ·선정성'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사가치가 충분했다. 하지만 언론은 가차없는 냉철한 가치판단을 내렸다.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과연 뉴스가치가 없어서였을까?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 그리고 책임자 사과 등을 요구한 이후 최근까지 한국기자협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들은 법조계와 관련 있는 신문사내 수많은 선배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압박을 받았다. "잘 봐줘라" "그 기자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냐?" "그 검사 정말 좋은 사람이라던데" "사건 자체만으로 이미 가해 검사는 출세길이 막혔는데, 참아라" 등등 직간접적인 압력의 말을 들어야 했다. 검찰쪽에서 조직적으로 로비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언론사내 남성들의 성차별적인 인식도 이번 사건을 축소하는 데 한몫을 했다고 본다. 시위나 사건 현장을 취재하려던 남성기자들이 검찰 관계자의 폭언을 듣거나의경들에게 맞는사건이 발생했을 때 동업자에 예우차원에서 일제히 보도해온 관행에 비추어 이 사건에 대해서는 유독 인색했다. 하물며 성희롱사건은 신체적 충격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피해까지 더해지는 데도 말이다.
이 사건이 검찰과 같은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집단은 물론 언론의 낡은 성인식에 대한 깊은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됐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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