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 유일한 범죄 원인으로 보도 안 돼"

기자협회 등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 제정
"정신질환 치료·예방 가능…회복 관심 둬야"

'캔바'로 만든 AI 이미지.

한 40대 남성이 이웃집 할머니를 살해했다. 집 밖을 배회하다가 노부부를 발견하자 지팡이를 빼앗아 휘둘렀다. 크게 다친 할머니는 병원에서 숨졌다. 남성은 노부부 외에 다른 노인 한 명도 폭행했다. 범행 닷새 전부터 조현병 치료 약을 먹지 않았다. 어떻게 보도해야 좋을까.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막기 위한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이 마련됐다. 한국기자협회와 보건복지부,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이 함께 제정해 22일 발표했다. 다섯 가지 원칙을 두고 그 아래 세부 설명을 넣었다. 기자들이 쉽게 참고할 수 있게 A4 용지 반쪽 정도 분량으로 압축적으로 정리했다.

앞선 사건은 올해 7월 보도됐다. 많은 언론이 조현병을 주제로 잡아 제목을 짓고 도입문(리드)을 썼다. 이 남성을 ‘조현병 40대’로 아예 진단명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다. 관행대로 사건 경위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자연스럽게 강조한 것이었겠지만 권고기준에 따르면 모두 부적절하다.

권고기준은 정신질환을 범죄 원인으로 연관 짓는 보도는 극히 신중히 하라고 강조한다. 혐오와 공포감 유발이 올바르지 않을 뿐더러 사실에도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성이 약물 치료를 중단하긴 했어도 범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집 주변을 돌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건장한 남성에게는 범행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징역 20년을 선고한 재판부는 “제압하기 쉬운 노년층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며 죄질이 나쁘다고 지적했다. 앞서 최후진술에서 남성은 “약만 잘 먹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심신미약을 주장해 감형을 호소했었다. 경찰 조사에서는 평소 노부부에게 불만이 컸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권고기준 제정위원회 위원인 지형철 기자협회 부회장(KBS 기자)은 제목이나 도입문은 사건의 성격과 인과관계를 강하게 암시한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또 경찰이 피의자의 정신적인 병력을 발표하더라도 그대로 받아쓰기보다 주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는지 검증하고 다른 정황도 취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 부회장은 “조현병이 원인인 사건도 물론 있겠지만 그런 때에도 유일한 원인으로 단정하면 안 된다”며 “다른 정신질환자들에게는 상처가 되고 가해자들에게는 면죄부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권고기준에서 ‘절대 안 된다’고 하지 않고 ‘극히’ 신중히 하라고 표현한 이유이기도 하다.

권고기준은 금지 문언과 함께 어떤 보도가 좋은 보도인지 지침도 제공한다. 권고기준의 첫 번째 원칙은 “정신질환은 치료와 예방이 가능하며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회복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 원칙은 다양한 회복 사례를 보도해 긍정적 인식과 사회 통합을 촉진해 달라는 취지다. 정신질환을 극복하고 완치해야 할 대상으로 보라는 뜻이 아니라 질환이 있더라도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제정위원회 위원인 서미경 경상국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정신질환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편견을 줄인다는 연구를 수행해 왔다. 올해 9월에는 언론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도 편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연구에서 대학생 144명을 실험집단으로 나눈 뒤 한쪽에는 편견을 조장하는 기사만 보여주고 다른 한쪽에는 회복 사례를 전하는 기사를 보여줬다. 부정적인 기사를 본 집단은 이전과 별로 변화가 없었지만 긍정적 기사를 접한 집단은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유의미하게 높아졌다.

서 교수는 “부정적인 인식은 오랜 시간을 두고 다양한 매체에서 반복돼야 형성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회복에 관한 기사에서 긍정적 변화가 일어난 건 뜻밖이었다. 학생들이 ‘이런 일이 있는지 몰랐다’면서 주관식 답변을 길고 자세하게 작성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그러면서 “정신질환 당사자가 자신을 직접 드러내고 주변 사람들과 접촉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데 미디어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며 “언론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10명의 제정위원 모두가 공감해 첫 번째 원칙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권고기준은 올해 1월 개정된 정신건강복지법에 제정 근거를 두고 있기도 하다. 기자협회가 다른 단체들과 함께 만든 자살예방 보도준칙과 아동학대 언론보도 권고기준 등도 이를 유지, 발전해 나갈 법적 근거가 자살예방법과 아동복지법에 마련됐다.

박성동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