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현재 역사 논란이 뜨겁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이 ‘강제동원’ 표기를 거부했음에도 별다른 조치 없이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합의해 버렸다. 독립기념관장에는 뉴라이트 역사관을 가진 김형석씨가 임명되면서 광복절 기념식은 두 동강이 났다. “나라가 망했는데. 일제시대 국적은 일본”이라던 김문수씨는 고용노동부 장관에 올랐다. 여기에 독도 조형물 철거를 둘러싼 논쟁과 한국학력평가원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에 이르기까지, 언제 끝날지 모를 날들이다. 그 중심에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라는 윤석열 정부의 퍼주기 일본 외교가 있다. 올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8월14일)’은 그 한 가운데를 지났다.
‘기림의 날’은 어떤 날인가.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입니다”라며 김학순 인권활동가가 일본의 전쟁범죄를 폭로한 날을 기념해 201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재야말로 일본 제국주의 추악한 실체의 단면이며, 이들의 목소리는 일제의 강제 점령을 부정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주목도가 높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주목한 언론은 소수에 그쳤다. 어딘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날의 불편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복됐다. 8월19일, MBC ‘뉴스데스크’는 특정 대학교 학생을 포함해 1200명이 연루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소식을 전했다. 이후 관련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불법 합성 사진이 전국에서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텔레그램 딥페이크 피해학교 지도’ 서비스가 제공되면서 사건의 심각성은 더욱 도드라졌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피해학교를 나타낸 표식이 곧 피해의 규모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괜히 ‘국가적 재난 사태’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다.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을 다룬 언론보도를 따라가며 또다시 불편해졌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은 그것이 범죄라 하더라도 여전히 주변부에 위치되는 현실이 그랬다. 윤석열 대통령이 ‘디지털 성범죄 뿌리 뽑아 달라’고 주문한 이후에 언론 보도량이 급격히 늘었다. ‘과잉규제’부터 걱정하고 나선 어느 국회의원의 지분도 빼놓을 수 없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에 기댈 게 없다는 점이다. n번방 사태를 겪고도 한국 사회에서 텔레그램을 매개로 한 성범죄가 대규모로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걸 모르는 여성들은 많지 않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구조적 성차별을 빼놓고는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부터 줄곧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해체’를 공약으로 제시한 정부였다. 대통령 취임 뒤에는 디지털성범죄TF를 해산시켰고 관련 예산도 대폭 삭감했다. 현재는 여성가족부 장관조차 지명하지 않고 있다. 말로만 하는 정치는 누가 못하나.
최근 충남도와 여성긴급전화1366충남센터, 충남아동·청소년센터가 제작해 유포한 ‘딥페이크는 엄연한 범죄입니다’ 카드뉴스에서 가해자를 여성으로, 피해자를 남성으로 묘사해 논란을 빚었다. 여성들의 항의 전화에 이들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한심한 노릇이다. 이 정도면,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 성폭력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존재해선 안 되는 무언가인 게 확실하다.
그 사이 피해자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저 사람도 내 합성 사진을 본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일상이 무너져 가고 있다. 언제까지 ‘텔레그램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다’며 손을 놓고, ‘실제 사진이 아닌 합성’이라며 집행유예 선고를 되풀이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건이 발생해야만 주목하고 그마저도 정치인의 입에 기대는 언론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답답한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 성차별은 견고하다는 게 그것이다. 참으로 불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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