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만 해도 사업자들을 만나면 뭘 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이젠 ‘할 게 없다’ ‘늦었다’라고 얘기 드린다.”
세계가 디지털 패권 경쟁으로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국경 없는 디지털 세상에서 자국 기업이나 문화,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장벽 세우기도 노골적으로 이뤄지는 분위기다.
반면 한국은? ‘기승전-정쟁’으로 수렴되는 정치 구조와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을 풀 수 있는 ‘정치’의 부재 속에서 ‘규제냐 혁신이냐’ 실천 없는 논쟁만 거듭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글로벌 미디어 사업자들의 영향력은 손 쓸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거대 공룡’ 네이버와 카카오마저 위상이 예전 같지 않고, 국내 방송 미디어 산업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한국언론학회가 ‘세계 미디어 플랫폼 산업 지형 대변화에 따른 국내 산업의 현황과 대응’이란 대기획 주제로 10일과 17일 연속 세미나를 마련한 것은 이런 위기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거대 자본과 기술력을 앞세운 글로벌 사업자들의 공세 속에서 국내 미디어 플랫폼 산업이 계속해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 지속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적어도 방송 미디어 산업과 관련해서는 그 물음표가 더 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현장에선 아우성이 커져만 가는데, 정책당국에선 여전히 규제 완화나 지원책 등을 ‘검토’만 하고 있다. 10일 언론학회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기존의 방송정책 모델이 더는 작동할 수 없으며,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규제 체계 혁신 등의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이상원 경희대 교수는 희소한 자원인 전파 사용권과 방송시장에서의 독과점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국가가 방송사업자에 공적 책무를 부여하는 현행 수탁제(trusteeship) 모델은 지속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헌율 고려대 교수도 “우리나라는 방송을 국가 중심 체제에서 규제 대상으로 보고 합병 등을 막아왔는데, ‘그땐 옳고 지금은 틀리다’”며 국가가 주도하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가 진입 장벽을 세워 사업자 수를 제한하는 기존 수탁제 모델에선 독과점을 통한 안정적인 수익 추구가 가능했고, 이를 통해 방송이 공적 서비스를 감당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글로벌 사업자들이 들어오면서 미디어 시청 행태가 크게 바뀌었고, 덩달아 방송의 안정적인 재원 구조가 뒤흔들렸다. 조성동 인하대 교수는 “비실시간적 영역에서 시공간 자율성을 겸비한 콘텐츠 위주로 소비되는 환경이 되면서 글로벌 사업자가 방송 영역의 수익을 가져가는 문제가 발생했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온 방송 미디어 모델 자체가 크게 흔들리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사업자에 다 퍼주기? “위험수위 왔다”
‘규제 밖’ 글로벌 사업자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문재인 정부부터 두드러진 규제 완화 시도는 지난 3월 국무총리 산하 미디어·콘텐츠산업융합발전위원회(융발위)가 내놓은 규제 개편 및 진흥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주무 부처의 하나인 방송통신위원회의 파행 운영과 정치적 논쟁 등으로 실행에 옮겨진 건 거의 없다. 조성동 교수는 “신속하게 하지 않으면 규제 당국이 모든 재원을 글로벌 사업자에 넘어가게 푸시해주는(밀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언젠가 하겠습니다’라고만 하기엔 위험수위에 온 것 같다. 과거 방송법 체계에 맴돌던 것들을 빨리 뜯어고치지 않으면 우리 방송 미디어 영역은 고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천혜선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의지가 없는 건 정부만이 아니라 산업계도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사업자들이 이해관계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실기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소비자들의 미디어 선호도가 달라졌다”며 “솔직히 말하자면 각자도생으로 알아서 수익모델, 비즈니스모델을 개척하고 절체절명의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 위원은 “시장의 크기는 더 커지지 않을 거고, 사업자 수가 줄지 않으면 개별 사업자의 매출은 늘지 않는다”며 “‘규모의 경제’에 도달한 사업자만 생존 가능할 것이고, 본질적으로 그 문제를 고민할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현행 포지티브 규제(되는 것 빼고 다 안 되는) 대신 네거티브 규제(안 되는 것 빼고 다 되는)로 가야 한다면서 “방송 역무, 방송산업 경계, 시장 획정을 깨뜨려 대규모 사업자가 나타나게 하는 게 글로벌 사업자와의 경쟁에서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정부의 진흥정책도 별 효과는 없을 것이라며 방송사업자 스스로 자생적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사업 등 혁신 계획을 마련하고 이에 관해 필요한 구체적인 규제 개선을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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